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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바느질하는 손 – 황금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4. 7. 29. 10:18
아래의 시는 7월 27일 토요일 오전 라디오 방송 《주현미의 러브레터》의 "마음에 스며드는 느낌 한 스푼"에서 소개되었다. 전문은 아래와 같다. 바느질하는 손 – 황금찬 시인 자정이 넘은 시각에도 아내는바느질을 하고 있다.장난과 트집으로 때묻은 어린놈이아내의 무릎 옆에서 잠자고 있다. 손마디가 굵은 아내의 손은얼음처럼 차다.한평생 살면서 위로를 모르는 내가오늘따라 면경을 본다. 겹실을 꿴 긴 바늘이 아내의 손끝에선사랑이 되고때꾸러기의 뚫어진 바지 구멍을아내는 그 사랑으로 메우고 있다. 아내의 사랑으로 어린놈은 크고어린놈이 자라면 아내는 늙는다. 내일도 날인데 그만 자지,아내는 대답 대신쓸쓸히 웃는다. 밤이 깊어질수록 촉광이 밝고촉광이 밝을수록아내의 눈가에 잔주름이더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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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보문동 – 권대웅 시인현대시/한국시 2024. 7. 20. 22:12
아래의 시는 오늘 밤 라디오 방송 《청하의 볼륨을 높여라》에서 소개되었던 시이다. 보문동 – 권대웅 시인 미음자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쌀을 씻는 어머니 어깨 위로 뿌려지는 찬물처럼 가을이 왔다반쯤 열린 나무 대문을 밀고 삐그덕 들어오는 바람마당에 핀 백일홍 줄기를 흔들며 목 쉰 소리를 낸다곧 백일홍이 지겠구나 부엌으로 들어가는 어머니 뒷모습이 아득하다툇마루에 놓여 있던 세발자전거햇빛이 너무 좋아서 그 곁에서 깜빡 졸고 일어났을 뿐인데백발이 되었다기와지붕 너울 너머로 날아가는 나뭇잎들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구름들꽃잎에 섞인 빗방울의 날들 어둑해지는 처마 밑으로 우수수 떨어진다지금 여기가 어디지? 몇 세기를 살고 있는 것이지? 돌아보면 어둑어둑 텅 빈 마당 어머니가 꼭 잠가 놓고 가지 않은 수돗물 소리 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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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늙어가는 길 - 윤석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4. 7. 19. 10:21
아래의 시는 오늘 아침 라디오 방송 《주현미의 러브레터》의 "마음에 스며드는 느낌 한 스푼"에서 소개된 시이다. 늙어가는 길 – 윤석구 시인처음 가는 길입니다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입니다무엇 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었지만늙어 가는 이 길은 몸과 마음도 같지 않고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어리둥절할 때가 많습니다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곤 합니다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어릴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었고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처음 늙어 가는 이 길은 너무 어렵습니다언제부터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애틋한 친구가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그래도 가다 보면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노욕인 줄 알면서도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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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자두 – 이상국 시인현대시/한국시 2024. 7. 15. 22:10
아래의 시는 오늘 아침 《주현미의 러브레터》의 "마음에 스며드는 느낌 한 스푼"에서 소개된 시이다. 자두 – 이상국 시인 나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대학 보내 달라고 데모했다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는데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해서 밥을 굶기로 했다방문을 걸어 잠그고우물물만 퍼 마시며 이삼일이 지났는데도아버지는 여전히 논으로 가고어머니는 밭 매러 가고형들도 모르는 척해가 지면 저희끼리 밥 먹고 불 끄고 자기만 했다며칠이 지나고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밤 되면 식구들이 잠든 걸 확인하고몰래 울밖 자두나무에 올라가 자두를 따 먹었다동네가 다 나서도 서울 가긴 틀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그렇게 낮엔 굶고 밤으로는 자두로 배를 채웠다내 딴엔 세상에 나와 처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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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집에 대한 예의 / 이길원 시인(1945-)현대시/한국시 2024. 7. 15. 22:08
아래의 시는 7월 14일 일요일 오전 《주현미의 러브레터》의 "마음에 스며드는 느낌 한 스푼"에서 소개된 시이다. 집에 대한 예의 / 이길원 시인(1945-) 사랑하라긴 여행길에 오른 당신의 삶을 비바람 태풍에 끄떡없는 집을 짓는 까치도제 몸보다 수백 배 큰 집을 짓는 개미도기도하듯 만든 집에서새끼 낳고 키우며 사랑 하나로 버티거늘우리 삶에 사랑이 없다면 궁궐 인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사막을 걷는 낙타의 오아시스 같은 집일을 마치고 해거름 돌아와하루를 감사해 하며내일이면 다시 못할 것처럼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웃고철없는 아이처럼 뛰며살아 있음을 마음껏 즐거워하라이는 집에 대한 당신의 예의 여행이 끝나는 날 마지막 휴식처가장 편안한 무덤의 문을 열 때까지.* 이길원 : 1945년 충북 청원 출생,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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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공휴일 / 김사인 시인현대시/한국시 2024. 7. 15. 22:04
아래의 시는 7월 13일 토요일 오전에 《주현미의 러브레터》의 "마음에 스며드는 느낌 한 스푼"에 소개된 시이다. 공휴일 / 김사인 시인 중랑교 난간에 비슬막히 식구들 세워놓고사내 하나 사진을 찍는다햇볕에 절어 얼굴 검고히쭉비쭉 신바람 나 가족사진 찍는데아이 들쳐업은 촌스러운 여편네는생전 처음 일이 쑥스럽고 좋아서발그란 얼굴을 어쩔 줄 모르는데큰애는 엄마 곁에 붙어서학교에서 배운 대로 차렷을 하고눈만 때굴때굴 숨죽이고 섰는데그 곁 난간 틈으로는웬 코스모스도 하나 고개 뽑고 내다보는데짐을 맡아들고 장모인지 시어미인지오가는 사람들 저리 좀 비키라고부산도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