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詩) 눈사람의 봄날 - 박서영 시인

밝은하늘孤舟獨釣 2022. 12. 7. 13:04

눈사람의 봄날 - 박서영 시인

 

이사 다닌 집들이 눈사람처럼 녹아 사라져버렸다

환한 벚꽃이 깨진 창문을 잠시 엿보다 가버리고

이후의 긴 그늘에 대해선 모두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 국도를 지나쳐, 지나쳐온 봄날이었다

길 고양이 한 마리처럼 도시 외곽에서 달을 분양 받았지만

나의 열망은 달과 태양을 제본하는 것

한겨울에 만든 눈사람을 한여름에도 들여다보는 것

태양의 밀짚모자를 쓴 채

달의 털모자를 쓴 채

태양과 달은 서로의 표정을 사각사각 베어 먹고 있다

그러나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는

뜨겁고 차가운 두 얼굴은 그냥 놔두시길,

괜한 관심으로 눈썹과 코와 입술을

그려 넣지 마시길,

지금은 눈사람처럼 녹아내리고 있는 집에 들어가

그 해의 환했던 벚꽃과

어느 여름밤의 뜨거운 포옹과

술렁이는 꽃그늘 따위를 모두 들고 나오고 싶은 날이다

어쩌면 이미 누군가 청소하면서 다 치워버렸을

쓸모없이 소중하고 궁핍한 기억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