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시) 바다 수선집 – 강영환 시인(1951-)

밝은하늘孤舟獨釣 2024. 3. 11. 10:20

아래의 시는 오늘 <주현미의 러브레터>의 "느낌 한 스푼"에서 소개되었다. 라디오로 들었는데도 이 시는 이미지가 떠오르고 듣는 맛이 좋았는데, 읽어보아도 읽는 맛이 좋다. 이 시는 심지어 유머가 담겨 있고 절로 웃음이 피어오르게 하는 훌륭한 작품이다. 한 폭의 수채화, 한 편의 단편영화를 글로 옮겨놓은 듯하다. 참 좋은 시다.

 

바다 수선집 강영환 시인(1951-)

 

자갈치 해안길 집과 집 사이 세를 얻은 틈새에 틀 한 대 갖다 놓고 옷을 수선해 주는 할머니가 있다

옷을 줄이거나 늘이거나 바다로 나서는 수부들 못 고치는 옷이 없다

소문을 듣고 가끔 바다도 수선하러 들른다

급히 오다 넘어져 무릎 찢어진 파도도 들들들들 한두 번 박으면 말끔하다

제멋에 뛰어오르다 갈매기에게 등짝을 물어뜯긴 숭어도 한 박음이면 깜쪽같다

어디 수선할 것이 없는지 콧등에 걸친 돋보기를 올리며 내다보는 얼굴이 돌고래다

폐그물에 걸려 죽은 썩어빠진 준치는 수선할 길이 없어 악취를 들쥐에게 주고 외면할 수밖에

폐비닐에 헛배 부른 귀신고래가 와서 꺽꺽 울부짖어도 그녀 틀대가리는 꺼내 쓸 수가 없다

바다도 죽고 나면 이 일도 접어야겠다고 긴 숨에 묻어나는 냉기를 바다에 쏟아 넣고 있지만

바다 덕에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그녀 등 뒤에는 물러나지 않는 키 큰 바다가 언제나 실한 기둥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