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시) 십일조 - 도종환 시인

밝은하늘孤舟獨釣 2024. 3. 14. 21:49

십일조 - 도종환 시인

 

새벽에 깨어 블라인드 틈을 손가락으로 열었더니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밤안개의 꼬리가

강 하류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게 보인다

어머니 새벽미사 나가실 시간이다

어머니처럼 꼬박꼬박 미사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하느님과는 자주 독대를 한다

독대를 한다고 특별한 대화를 나누는 건 아니다

엊그제  핀 상사화가 일찍 졌다는 말

어제 하루와 두끼 식사에 감사하고

어제도 되풀이했던 실수와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

분노하는 이들도 위로가 필요하다는 말

그런 시시콜콜한 말을 주고받는다

주로 내 혼잣말이 길고

그분은 듣기만 하실 때가 많다

내 아침기도가 고요로 채워져 있는 것도 문제이긴 하지만

교황님과 독대할 순 없어도

하느님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건 고요 덕이다

수입의 십분의 일을 꼬박꼬박 바치지는 못하지만

대신 내 생의 십일조를 바치고 싶다

어머니가 늘 나를 위해 기도하시므로

나는 남을 위해 기도하고 세상을 위해 일하며

인생의 십분의 일을 바치고 싶다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도 큰일이지만

인생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도

작은 일이 아니라는 걸 하느님은 아실 것이다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이 책상 가득 쌓여 있고

일정표는 이미 몇주일 치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고

하루를 얼마나 잘게 쪼개야

연민을 위해 시간을 쓸 수 있는지 아실 터이므로

슬픔을 위해

당신을 위해 십분의 일을 쓸 수 있는지 아실 터이므로

 

- 도종환 시집 <사월 바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