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시) 봄밤 – 이기철 시인

밝은하늘孤舟獨釣 2024. 4. 5. 20:55

봄밤 이기철 시인

 

가난도 지나고 보면 즐거운 친구라고

배춧국 김 오르는 양은그릇들이 날을 부딪치며 속삭인다

쌀과 채소가 내 안에 타올라 목숨이 되는 것을

나무의 무언으로는 전할 수가 없어 시로 써보는 봄밤

어느 집 눈썹 여린 처녀가 삼십 촉 전등 아래

이별이 긴 소설을 읽는가 보다

땅 위에는 내가 아는 이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서까래 아래 제 이름 가꾸듯 제 아이를 다독여 잠재운다

여기에 우리는 한 생을 살려왔다

 

누가 푸른 밤이면 오리나무 숲에서 비둘기를 울리는지

동정 다는 아낙의 바느질 소리에 비둘기 울음이 기워지는 봄밤

잊히지 않은 것들은 모두 슬픈 빛깔을 띠고 있다

숟가락으로 되질해 온 생이 나이테 없어

이제 제 나이 헤는 것도 형벌인 세월

낮에 잘린 봄풀이 작년의 그루터기 위에

또 푸르게 돋는다

여기에 우리는 잠시 주소를 적어두려 왔다

 

어느 집인들 한 오라기 근심 없는 집이 있으랴

군불 때는 연기들은 한 가정의 고통을 태우며 타오르

근심이 쌓여 추녀가 낮아지는 집들

여기에 우리는 한 줌의 삶을 기탁하러 왔다

 

*설명*

행복의 얼굴은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의 얼굴을 모두 다르다, 라고 문호 톨스토이는 말했습니다... 마냥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조금 마음을 억제하고 불행하다고 느낄 때는 조금 마음을 돋운다면 행복과 불행은 줄무늬 남방처럼 서로를 양보하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집으로 건너온 장미꽃처럼 시가 이렇게 왔습니다> 1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