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시) 나무 같은 사람 – 이기철 시인

밝은하늘孤舟獨釣 2024. 4. 7. 19:11

나무 같은 사람 이기철 시인

 

나무 같은 사람 만나면 나도 나무가 되어

그이 곁에 서고 싶다

그가 푸른 이파리로 흔들리면 나도 그의 이파리에 잠시 맺는

이슬이 되고 싶다

 

그 둥치 땅 위에 세우고

그 잎새 하늘에 피워놓고도

제 모습 땅속에 감추고 있는 뿌리 같은 사람 만나면

그이 안 보이는 마음속에

놀 같은 방 한 칸 지어

그와 하룻밤 자고 싶다

 

햇빛 밝은 날 저자에 나가

비둘기처럼 어깨 여린 사람 만나면

수박색 속옷 한 벌 그에게 사주고

그의 버드나무잎 같은 미소 한 번 바라보고 싶다

 

갓 사온 시금치 다듬어놓고

거울 앞에서 머리 빗는 시금치 같은 사람,

접으면 손수건만 하고 펼치면 놀만 한 가슴 지닌 사람

그가 오늘 걸어온 길, 발에 맞는 편상화

 

늦은 밤에 혼자서 엽록색 잉크를 찍어 편지 쓰는 사람

그가 잠자리에 들 때

나는 혼자 불 켜진 방에 앉아

그의 치마 벗는 소리 듣고 싶다

 

- <우리 집으로 건너온 장미꽃처럼 시가 이렇게 왔습니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