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시) 이발을 하며 - 임영조 시인

밝은하늘孤舟獨釣 2024. 5. 19. 11:27

아래의 시는 오늘 아침 《주현미의 러브레터》의 "마음에 스며드는 느낌 한 스푼"에서 소개된 시이다.

 

이발을 하며 - 임영조 시인

 

일요일 아침

이발소 거울 앞에 앉으면

한 달 전에 헤어진 나를 만난다

 

말없이 주고 받는 눈인사

그새 우리는 많이 수척해졌군,

그것은 결코 새로 미친 바람탓

 

스스로 전부를 맡긴다

서슬퍼런 가위와 칼날 앞에

머리를 맡기고, 얼굴을 맡긴다

손발을 맡기고, 믿음까지 맡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듯

타인의 독선 앞에 괸대했던가

 

정중하게 빛나는 가위 속에서

검게 자란 시간이 잘려나간다

턱 밑에 무성하던 교만이

단칼에 모조리 스러질 때는

감격으로 차라리 눈을 감는다

 

조심조심 귀를 후빈다

밖에서 들은 치욕의 말씀들이

귓밥이 되어 웃음이 되어

시원하고 간지럽게 빠져나온다

 

그러나 눈에 박힌 가시는 또

어디 가서 파낼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노상

죄지은 사람처럼

속으로나 눈물 글썽거리며

날마다 시력을 잃고 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