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시) 비가(悲歌) - 권오표 시인(1950-)

밝은하늘孤舟獨釣 2024. 6. 8. 18:59

아래의 시도 시집을 읽다가 발견한 아름다운 시이다.

 

비가(悲歌) - 권오표 시인(1950-)

 

갓 뽑은 무 밑동처럼

서늘한 눈매를 지닌 사람과

11월의 숲에 갔었네

엊그제 찬비 그친 뒤 더욱

수척해진 낮달

하늘은 곡옥(曲玉)빛 그렁그렁한

눈물을 쏟고 있었어

그의 쓸쓸한 어깨처럼

나무들도 쓸쓸했네

그는 저만치 오도카니 서서

신발 끝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지우고 그렸다 지우고

나는 날개 끝에 서리 묻은 새에게

한쪽 팔을 내어주는

나뭇가지를 보고 있었네

바람도 없는데

그의 그림자가 물결처럼

조금씩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어

그의 등 뒤에서

내 그림자도 속절없이 밀물져 흔들렸어

홀로 남은 개옻나무 붉디붉은

잎새 하나

울컥, 떨어졌어

 

- 권오표 시집, 너물 멀지 않게,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