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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 박노해 시인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 박노해 시인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슬퍼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이란 없으니 온 하늘이 새의 길이듯 삶이 온통 사람의 길이니 모든 새로운 길이란 잘못 들어선 발길에서 찾아졌으니 때로 잘못 들어선 어둠 속에서 끝내 자신의 빛나는 길 하나 캄캄한 어둠만큼 밝아오는 것이니

현대시/한국시 2023.02.26

(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시인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시인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뭇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집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을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

현대시/한국시 2023.02.26

(詩) 편지-시골에 있는 숙에게- 신경림 시인

편지 -시골에 있는 숙에게- 신경림 시인 신새벽에 일어나 비린내 역한 장바닥을 걸었다 생선장수 아주머니한테 동태 두 마리 사 들고 목롯집에서 새벽 장꾼들과 어울려 뜨거운 해장국을 마셨다 거기서 나는 보았구나 장바닥에 밴 끈끈한 삶을, 살을 맞비비며 사는 그 넉넉함을, 세상을 밀고 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생각하느니보다 삶은 더 크고 넓은 것일까, 더 억세고 질긴 것일까 네가 보낸 편지를 주머니 속으로 만지면서 손에 든 두 마리 동태가 떨어져나갈 때까지 숙아, 나는 걷고 또 걸었구나 크고 밝은 새해의 아침해와 골목 어귀에서 마주칠 때까지 걷고 또 걸었구나

현대시/한국시 2023.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