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부활절에 / 김수복 시인 (1953-)

밝은하늘孤舟獨釣 2009. 4. 3. 10:50

부활절에 / 김수복 (1953-)

<시와 십자가>에서

 

사순 제4주일 저녁미사를 마치고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 한 알의 밀알로만 남는다는 강론이 떠올랐다 한 알의 밀알이 한 그루의 나무가 되고 4월의 하늘이 되고 4월의 바다가 되었다 성당 앞 마리아 상을 지나오면서 서쪽으로 날으는 새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쪽으로 뜰 안 홍도화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새들도 줄지어 노을 속으로 떠나고 한 알의 밀알이 썩는 노을의 한복판으로 자꾸자꾸 커오르는 홍도화나무가 튼튼한 목소리를 내었다 사순 제4주일 저녁미사는 앞산의 산 그림자와 사라져가는 새의 비상과 커오르는 홍도화나무 제단 앞에서 막을 내렸다 성당 계단을 빠져나오며 몇 개의 별들이 십자가 가운데서 빛나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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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시를 읽었을 때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찜해두었던 시이다. 한 알의 밀알이 썩는다는 것은 고통과 암흑과 같은 감정만 동반하기 쉬운데 이 시처럼 아름다운 죽음, 아름다운 고통, 아름다운 썩음도 묵상해볼 수 있겠다. 지금은 고통이 힘들어도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회상할 수 있는 순간이 왔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