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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나의 문학 나의 삶/ 광부(鑛夫) 그리고 목부(牧夫) 정일남 시인!
    현대시/한국시 2009. 4. 7. 21:01

    내 젊음을 앗아간 탄전지대[나의 문학, 나의 삶]

    나는 화전민火田民의 아들이었다.
    ‘화전민’이란 들판에 땅이 없어 산골짝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궈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이사를 갔는데, 화전민이 되기 위해서였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뒤를 따라 화전 일을 도왔다.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애당리― 태백산이 멀리 보이는 산줄기에서 아버지는 콩 녹두 메밀 조 옥수수 등을 농사지었는데, 나는 노을 지는 서산을 바라보며 소월의 시를 읊으며 저녁 한때를 보내곤 했었다.
    내가 맨 처음에 접한 시집이 소월素月의 시집이었다.
    나는 소월의 시에 빠져 헤어날 수 없었다. 소월의 시세계가 나를 그렇게 사로잡은 이유를 모르겠다. 아마 그의 가난한 처지가 나의 처지와 맞물린 탓일 것이다.
    지금 내가 서정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소월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특히 노을이니 녹두새니 솔바람 등의 시어를 버리지 못하는 것도 그 영향의 하나라 생각한다. 그야 어떻든 산새가 울면 녹두꽃이 피었고, 솔바람이 불어 이마의 땀을 씻어주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런 처지에서 싹튼 것이 나를 지금까지 시마詩魔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 이유일 것이다.
    세월은 흘렀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을 맞았다. 정부에서는 산림녹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그 이유로 해서 화전민들은 화전골을 떠나게 되었다. 아버지도 생활의 터전을 버리고 다시 고향 삼척으로 귀향하게 되었다.
    나는 성장해서 대학 2년을 다니다가 군에 입대했다. 전방 야전부대에 배치되어 근무하면서 시를 습작했는데, 마침 미군 야전사령부에서 발간하는 주간지 ≪불즈아이≫에 나의 습작품 <야전지대>가 발표되었는데, 그것이 내 작품으로서 공식 발표되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군대생활을 하면서도 시를 쓰는 습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인쇄된 시를 보고 나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철조망에
    하오下午
    그림자 슬린다

    바람과 빛과 물체들의 고요한 사랑

    나 홀로 지키고 서면
    색깔 손끝 적셔 계절 튕긴다

    전선
    날 숨겨주는 산이라 믿어본다

    실탄 재어
    느껴보는 보드라운 생명

    기다리는 창문 두고
    외로운 바램은 항시 멀다

    이별을 뿌려두고
    지울 수 없는 사랑은 오지 않고

    바위와 산줄기와
    시냇물 번쩍이는 고요한 지속

    발자욱도 없는 달빛 속에
    총 뿌리를 향한 곳은 어딘가
    ―<야전지대> 전문

    나는 만기제대 해서 대학에 복교하지 못하고 광부가 되었다. 흔히 강원도 사람을 칭할 때 ‘감자바위’니 ‘암하노불’이니 하는 말을 많이 썼다. 어수룩하고 좀 모자란다는 뜻으로 빈정대는 이 말은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강원도 사람이 아닌 타도의 사람이 지어낸 것은 분명하다.
    이런 산골짝에 내 인생의 전성기를 묻어버릴 줄을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의 운명은 다가왔다.
    그런데 강원도가 ‘금 바위’란 이름으로 변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태백산 일대의 무진장의 석탄을 개발하면서부터였다. 실로 강원도를 다줘도 태백탄전太白炭田만은 줄 수 없다는 말이 나올 만했다.
    이젠 역사 속으로 묻혀버린 이야기가 되고 말았지만, 거리의 개들까지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석탄이 이렇게 전성기를 이루자, 8도에서 돈벌이하려고 강원도 골짜기로 모여들었다. 농가 몇 집이 있던 구릉지대에 인구가 12만에 이르는 탄광도시가 형성된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이 처음 개발해서 무진장의 석탄을 묵호항을 통해 일본으로 운반해갔다. 그들이 한국인을 노예처럼 부리며 캐 간 석탄의 수량을 지금도 정부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대학을 포기하고 광부생활에 충실하면서 여가시간을 이용해 시 습작에 정진했다. 60년대 초였다. 당시 중앙문단에 문학지로는 ≪현대문학≫과 ≪자유문학≫가 있었는데, 나는 그 중 ≪현대문학≫에 작품을 투고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지방에서 문학수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실히 느꼈다. 기성시인이 없는 지방에서의 습작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그러니 유명한 시인의 시를 읽고 사색하고 습작하는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현대문학≫에 계속 투고만 하고 있었다. 내 작품의 수준이 추천의 대상에 올랐는지도 모르고 무모한 짓만 거듭했던 것이다. 그것이 아마 십년은 되었으리라. 그 결과 79년 5월호 ≪현대문학≫에 첫 추천이라는 감격을 맛보게 되었다.
    그 작품은 다음과 같다.

    여긴 어느 세기의 복판인가
    누가 묻어버린 세기리니
    캄캄한 지층 틈 사이에서
    내가 만난 고생대의 아침이 처음으로 열린다
    죽은 광부가 매몰된 자리에서
    비로소 찾아낸 광맥
    캡 램프의 불빛에
    고생대의 아침이 처음으로 열린다
    지층 갈피마다 닫힌 하늘이
    환한 광택으로 빛나고
    바다로 달리던 능선이
    단층으로 멎어 있다
    늪가에 몇 마리 짐승이 우는가
    아니 어느 쪽에서 화산이 솟고
    용암이 끓어오르고 있는가
    한 광부가 매몰되기 전에
    이미 저것들은 매몰되어 있었다
    하늘과 바다와 산맥이
    이 깊은 지층 캄캄한 갱 속에
    매몰되어 있었거니
    오늘도 위태로운 갱 속에서
    누가 묻어버린 고생대를
    한 광부가 조금씩 캐내고 있다.
    ―<어느 갱坑 속에서> 전문

    나의 불행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마지막 2회 추천을 못 이루고 이인석 선생이 갑자기 작고한 사건이다. 나는 절망했다. ≪현대문학≫에 들러 김윤성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문단 진출은 김윤성 선생의 마지막 추천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그 전 73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화전근처>란 시조가 가작 1석으로 오른 일을 감안하면 2회 추천은 안 해도 되었을 것이라는 후문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과정을 정식으로 밟고 싶었던 것이다. 참고로 시조 <화전근처>를 여기에 옮겨본다.

    겉으로 타는 숨결 화염은 일어나도
    안으로 식은 가슴 잿더미 쌓이는가
    재생의 그 매운 불티 하늘 멀리 날린다.

    산울림 아우성은 형제들의 먼 이야기
    춘궁의 모진 계절 흙 한줌 혀대보면
    그 속에 타버린 혼이 싹이 되어 돋는가

    발아래 강을 끼고 목숨은 비탈져도
    붉은 놀 하늘 멀리 해묵은 능선은 길고
    내 이웃 지켜온 자리 다시 피는 엉겅퀴여

    사계의 바윗돌에 뿌리 내린 그 후손들
    그늘진 면적 안에 산 빛이 살아나면
    그 누구 돌보지 않아도 한 목숨 돋아날까
    ―<화전근처>의 전문

    나는 탄광에서 탄을 캐는 광부로서 최초의 ‘광부鑛夫시인’이란 칭호를 얻게 되었다. 나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누가 뭐래도 광부였고 시인이었다. 언젠가는 KBS방송국에서 취재차 현장에 와서 촬영하고 뉴스에 내 탄에 그슬린 얼굴이 나타나기도 했다. 나는 석탄을 캐면서 동시에 시를 캤다. 석탄도 에너지로써 중요한 것이었지만 시 또한 나로서는 중요한 것이었다.
    화전민을 노래한 나의 시조가 화전민의 애환을 노래했다면, <어느 갱 속에서>의 시는 내 체험의 산물이었다. 나는 석탄을 캐는 광부로서 충실했을 뿐, 노동운동에는 관심이 없었다. 석탄은 고생대의 숲이었다. 울창한 원시림이 지질 변동으로 인해서 지하에 묻히고 산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육지로 변하는 고생대의 천재지변이 결국 석탄이라는 에너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석탄을 캘 때마다 고생대의 새로운 아침을 맞았고 그 비린내 나는 숲에서 시의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석탄을 캐다보면 식물 화석이나 동물 화석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누구도 체험하지 못한 나만의 체험이었다. 식물의 나뭇잎이 선명한 화석은 나를 흥분시켰고, 물고기의 화석은 마치 고기가 살아 있는 듯한 착각에 나는 가슴이 떨렸다.

    바람은 스쳐가고 있었다
    철둑 너머 무덤 쪽으로
    햇살은 몰려가 쌓이고
    어둠을 찍어내는 연탄공장에
    쉼 없이 삽날은 번쩍거렸다
    모두가 한 번은 꽃이 되려고
    모두가 한 번은 불이 되려고
    아니 꼭 한 번만은
    고생대의 화산으로 돌아가려고
    망우리 역두에 쌓이고 있었다
    ―<석탄> 전문

    그랬다. 60년대와 70년대, 그리고 80년대 중반까지 서울의 수도를 위시하여 전국 도시는 석탄이 아니면 겨울을 지낼 수 없었다. 소위 석탄의 전성기였다. 이 무렵 광부들은 쉴 새 없이 석탄을 캤고, 석탄 차에 실어 전국 도시로 운반해갔다.
    나는 30대의 금싸라기 시절을 아무도 모르는 지하 막장에서 묵묵히 석탄을 캐며 시를 썼고, 그것을 문예지에 발표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갱도가 무너져 몇 시간씩 막장에 갇혀서 죽을 고비를 지낸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많은 동료 광부들이 탄 더미에 묻혀 죽어갔다. 나를 시인으로 키워준 탄광, 그 숱한 광부의 죽음을 딛고 나는 초라한 몰골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금 태백에 가면 순직한 광부의 위령탑이 높이 솟아 있다. 실로 3900여 명에 달한다. 이들의 희생이 없었던들 70년대와 80년대의 경제 불황을 어찌 딛고 일어날 수 있었으랴. 나는 이십여 년 간 탄광에 근무했다. 아마 나를 살려준 것은 시신詩神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점점 몸이 쇠약해갔다. 그러나 정신만은 맑았다. 정기검진 결과 폐가 나빠졌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있겠는가. 탄광 속에서 20년을 탄가루 먼지에서 살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정병원에서는 결핵약을 주었다. 이웃사람들은 뱀을 잡아먹으라고 했다. 나는 뱀을 잡아먹기도 했다. 그것이 주효했을지는 모르지만 기침이 차차 멎어갔다.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내 병이 좋아진 것은 문학도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내 제2의 고향인 탄전지대를 떠나기로 했다. 아쉬움이 많았지만, 서울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 문단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의 교육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도 할 것이 없었다. 석탄을 캐는 기술만 익힌 나는 막막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젖소목장이었다. 서울 근교에 축사를 빌려 젖소를 사육하고, 우유를 짜서 연세대학에 납품했다. 시집 ꡔ들플의 저항ꡕ을 낸 것도 이 무렵이었다. 80년도 초였다.
    내 초라한 목장에 많은 문인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두엄냄새를 마다하지 않고 마시며 내 생활이 자유스러워서 좋다고 했다.
    이 무렵 찾아온 문인으로는 정대구 조완호 김석 김병학 주원규 김윤성 윤석호 등이었다. 그들은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 와서 나의 작업을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힘들겠다고 했다.
    결국 나는 광부시인에서 ‘목부牧夫시인’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몸이 아파 우는 게 아니네
    배고파 우는 게 아니네
    때만 되면 우루루
    떼울음 우는 것은
    딱한 주인의 처지 때문이네
    말 못할 주인의 병 때문이네
    오늘도 벌판에서 돌아온 소들이
    주인의 살아가는 처지를
    환히 드려다 보고 있네
    ―<소 울음> 전문

    나는 소를 키우면서 소에게 배불리 먹이지 못했다. 그 육중한 배를 채워줄 풀을 힘에 겨워 제때에 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소의 처지를 아는 것과 같이, 소도 주인의 가난한 처지를 안다고 나는 믿었다. 나는 경운기를 몰고 냇가로 나갔다.
    초여름의 냇가는 무성한 풀이 자라고 있었다.
    낫으로 정신없이 풀을 베어 단을 묶은 후 경운기에 싣고 목장으로 돌아오면 멀리서 소들이 주인을 알아보았다. 푸른 풀은 결국 풀이 아니라 우유란 것을 나는 알았다. 싱싱한 풀을 먹은 소들은 그만큼 많은 우유를 내주었다. 나는 10년을 목장생활을 한 후 폐업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두서없이 더듬어 본 내 생애는 소년시절 화전민의 아들로 살아온 과거와 중년의 광부생활과 서울 근교에서의 목장생활로 압축할 수 있다.
    그 어느 생활도 내게는 타인으로부터의 간섭이 없는 자유로운 생활이었다.
    내 시의 영역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과격하고 힘 있는 시를 쓰지 못하고, 연약하고 나약한 시를 쓰면서 문단과는 외면한 채 은거하며 살아왔다. 이런 나의 고집스러운 생이 내게 손해를 끼쳤다고 나는 보지 않는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은거시인이다. 이런 습성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하는 수 없다.
    나는 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데는 능숙했지만, 산 전체나 광활한 들판을 보는 안목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시를 쓰는데 있어 편협 된 생각을 한 것이 단점이다.
    인간이 만든 문명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자연의 소리는 인간의 몫이 아니지만, 그 어느 음악에 비할 수 없이 아름다울 수 있다.
    언어는 흘러간다. 시도 그냥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다. 시대를 따라 흘러간다. 하루살이의 시와 시대를 초월한 시와의 관계는 엄연한 차이점이 있다.
    아, 높은 경지의 시를 쓰려 해도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옛 유배지에서 선인들은 괴로운 생활을 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계기가 되어 세상에 남기고 간 빼어난 작품이 있었다. 은거지隱居地는 고통과 괴로움의 은거지가 아니라, 오히려 보배로운 낙원이었다.
    오늘의 문인들은 은거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저 평범한 작품만을 쓸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작가와 시인은 자기의 가슴 속에 고독한 유배지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두메산골이나 외로운 섬으로 간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억압 받고 핍박 받는 민족이 오래 살아남듯이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앞서야 한다.
    낙락장송은 동반자도 없이 높은 절벽 위에서 홀로 자라고 송홧가루를 날린다. 줄기를 벋어서 생명의 강인함을 시간 속에 노출시킨다.
    결코 동반자 없는 고독을 슬퍼하거나 세월을 탓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는 좋은 터전에 자리 잡은 나무처럼 싱싱하고 살진 몸집은 아니다. 야위고 윤기가 없고 뒤틀리고 옹이진 운명은 척박한 인생살이와 같지만, 그 생명의 노래는 평지의 복 받은 나무에 비해 나약하지 않고 노래가 멀리까지 퍼져나간다.
    그 생명을 어찌 복되다 아니하랴. <세한도歲寒圖>의 나무가 척박한 것도 그 토양이 만들어낸 것이다. 추위의 언덕에 서서 세월의 아픔을 견디며 생명의 슬픔을 맛보는 나무가 <세한도>의 나무다. 그 고뇌를 나는 사랑한다.
    아. 회상하는 것은 다 슬프지만 그지없이 아름답다. 나의 인생도 나의 시도.






    출처 : 날아다니는 성냥
    글쓴이 : 정수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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