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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그러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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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들어가자면
불빛이 흘러나오는 古家가 보였다
거기 --
벌레 우는 가을이 있었다
벌판에 눈 덮인 달밤도 있었다
흰 나리꽃이 향을 토하는 저녁
손길이 흰 사람들은
꽃술을 따 문 병풍의
사슴을 이야기했다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가자면
지금도
전설처럼
古家엔 불빛이 보이련만
숱한 이야기들이 생각날까봐
몸을 소스라침은
비둘기같이 순한 마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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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어머니가 떠나시던 날 눈보라가 날렸다
언니는 흰 족도리를 쓰고
오라버니는 굴관을 차고
나는 흰 댕기 늘인 삼또아리를 쓰구
상여가 동리를 보구 하직하는
마지막 절하는 걸 봐도
나는 도무지 어머니가
아주 가시는 것 같지 않았다
그 가그마한 키를 하고
산엘 갔다 해가 지기 전
돌아오실 것만 같았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나는
어머니가 들어오실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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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이른 아침 黃菊(황국)을 안고
산소를 찾은 것은
가랑잎이 빨-가니 단풍 드는 때였다
이 길을 간 채 그만 돌아오지 않은 너
슬프다기보다는 아픈 가슴이어
흰 팻목들이
서러운 악보처럼 널려 있고
이따금 빈 우차가 덜덜대며 지나는 호전한 곳
황혼이 무서운 어두움을 뿌리면
내 안에 피어오르는
산모퉁이 한 개 무덤
비애가 꽃잎처럼 휘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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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
호랑담요를 쓰고 가마가
웃동리서 아랫말로 나려왔다
차일을 친 마당 멍석 우엔
잔치 국수상이 벌어지구
상을 받은 아주머니들은
이차떡에 절편에 대추랑 밤을 수건에 쌌다
대례를 지내는 마당에선
장옷을 입은 색시보담두 나는
그 머리에 쓴 칠보족도리가 더 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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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오월의 낮車가
배추꽃이 노오란 마을을 지나면
문득
「싱아」를 캐던 고향이 그리워
타관의 산을 보며
마음은
서쪽 하늘의 구름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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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저 푸른 하늘과
태양을 볼 수 있고
大氣를 마시며
내가 자유롭게 산보를 할 수 있는 한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이것만으로 나는 신에게 감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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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쳐다보며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본댔자
명예가 남보다 뛰어나본댔자
또 미운 놈을 혼내주어본다는 일
그까짓 것이 다- 무엇입니까
술 한잔만도 못한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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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새벽을 _성모의 밤에 쓸 수 있는 詩
내 가슴에선 사정없이 장미가 뜯겨지고
멀쩡하니 바보가 되어 서 있습니다
흙바람이 모래를 끼얹고는
껄껄 웃으며 달아납니다
이 시각에 어디메서 누가 우나봅니다
그 새벽들은 골짜구니 밑에 묻혀버렸으며
연인은 이미 배암의 춤을 추는 지 오래고
나는 혀끝으로 찌를 것을 단념했습니다
사람들 이젠 종소리에도 깨일 수 없는
악의 꽃 속에 묻힌 밤
여기 저도 모르게 저지른 악이 있고
남이 나로 인하여 지은 죄가 있을 겁니다
성모 마리아여
임종모양 무거운 이 밤을 물리쳐주소서
그리고 아름다운 새벽을
저마다 내가 죄인이노라 무릎 꿇을 -----
저마다 참회의 눈물 뺨을 적실 ------
아름다운 새벽을 가져다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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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언덕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안 하는 연유도
알아듣겠다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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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風에 부치는 노래__가을철 소회
가을 바람이 우수수 불어옵니다
신이 몰아오는 비인 마차소리가 들립니다.
웬일입니까
내 가슴이 써-늘하게 샅샅이 얼어듭니다
「인생은 짧다」고 설없이 옮겨본 노릇이
오늘 아침 이 말은 내 가슴에다
화살처럼 와서 박혔습니다
나는 아파서 몸을 추설 수가 없습니다
황혼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섭니다
하루하루가 금싸라기 같은 날들입니다
어쩌면 청춘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었습니까
연인들이여 인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은 듯이 지나버리는 생의 언덕에서
아름다운 꽃밭을 그대 만나거든
마음대로 앉아 노니다 가시오
남이야 뭐라든 상관할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 밤을 도와 하게 하시오
聰氣는 늘 지니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금싸라기 같은 날들이 하루하루 없어집니다
이것을 잠가둘 상아궤짝도 아무것도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낙엽이 내 창을 두드립니다
차시간을 놓친 손님모양 당황합니다
어쩌자고 신은 오늘이사 내게
청춘을 이렇듯 찬란하게 펴 보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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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길을 걸어서
--사월의 기도
그 겨울이 다 가고
산에 갔던 아이들 손엔 할미꽃이 들려졌다
사립문에 기대어 서서
진달래 자욱한 앞산을 바라보면
큰애기의 가슴은 파도모양 부풀어올랐다
사월 큰애기의 꿈은 무지개같이 찬란했다
웬일인지 이 봄엔 삼팔선이 터지고
나갔던 그이가 돌아올 것만 같다
「갔다 오리라」
생생하게 지금도 귀에 들린다
군복을 입은 모습
어찌 그리 늠름하고 더 잘나 보였을꼬
그이가 일선으로 나간 뒤부터
뉴-쓰 영화의 군인들이 모두 다
그이 같아 반가워졌다
주여
이 봄엔 통일을 꼭 가져다 주소서
그리하여
진달래 곱게 핀 꽃길을 걸어서
승전한 그이가 돌아오게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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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약
그 굳은 흙을 떠받으며
뜰 한구석에서
작약이 붉은 순을 뿜는다
늬도 좀 저모양 늬를 뿜어보렴
그야말로 즐거운 삶이 아니겠느냐
육십을 살아도 헛사는 친구들
세상눈치 안 보며
맘대로 산 날 좀 帳記(휘장장, 기록기)에서 뽑아보라
젊은 나이에 치미는 힘들이 없느냐
어찌할 수 없이 터지는 정열이 없느냐
남이 뭐란다는 것은
오로지 못생긴 친구만이 문제삼는 것
남의 자(尺)로는 남들 재라 하고
너는 늬 자로 너를 재일 일이다
작약이 제 순을 뿜는다
무서운 힘으로 제 순을 뿜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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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__ 요즘 읽기 좋은 시
가을은 마차를 타고 달아나는 신부
그는 온갖 화려한 것을 다 거두어가지고 갑니다
그래서 하늘은 더 아름다워 보이고
대기는 한층 밝아 보입니다
한금 한금 넘어가는 황혼의 햇살은
어쩌면 저렇게 진줏빛을 했습니까
가을 하늘은 밝은 호수
여기다 낯을 씻고 이제사 정신이 났습니다
은하와 북두칠성이 맑게 보입니다
비인 들을 달리는 바람소리가
왜 저처럼 요란합니까
우리에게서 무엇을 앗아가지고
가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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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일찍이 그대
帝王이 부럽지 않음은
어떤 세력에도 굽힘없이
네 붓대 곧고 엄해
총칼보다 서슬이 푸르렀음이어라
독기 낀 안개 자욱히 날빛을 가리고
밤도 아니요 낮도 아닌 상태에서
사람들 노상 지치고
예저기 썩은 냄새 코를 찔러
웃을 수 없는 광경에 모두들 고개 돌릴 제
시인
오늘 너는 무엇을 하느냐
권력에 아첨하는 날
네 冠은 진땅에 떨어지나니
네 성스러운 붓대를 들어라
네 두려움 없는 붓을 들어라
정의 위해
횃불 갖고 시를 쓰지 않으려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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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여인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가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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