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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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 - 신달자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2. 4. 22:44
아래의 시는 읽으면서 성모의 밤 행사 때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어머니 - 신달자 시인 한 송이 꽃인가 하고 다가서면 한 그루 나무 한 그루 나무인가 하고 다가서면 차라리 한 덩이 바위 한 덩이 바위인가 하고 우러르면 듬직한 산이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꽝꽝 언 대지 안에 사랑을 품고 키우는 겨울뿌리 얼음 속에서도 얼지 않는 생명이셨습니다 달빛 받는 외짝 신발처럼 홀로 울음을 가누는 고독한 성자(聖者) 눈물과 땀과 피 남김없이 흘리시고 그 마지막 죽음까지 뿌리에게 주는 완전한 봉헌이셨습니다 문학수첩에서 2001년 간행한 신달자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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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잔 - 정호승 시인(1950-)현대시/한국시 2023. 12. 4. 22:30
아래의 詩는 오늘 아침 의 "느낌 한 스푼"에서 소개된 詩이다. 노래로도 만들어졌다. 노래는 안치환이 불렀다. 노래 링크: https://youtu.be/rESnmdgUxa8?si=PkSwJP8JGzgGCiYq 술 한잔 - 정호승 시인(1950-)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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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1 - 신경림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2. 4. 09:31
나무 1 지리산에서 - 신경림 시인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랜덤하우스에서 나온 신경림 신화선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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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로 빚어진 사람 - 김선우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2. 4. 09:11
물로 빚어진 사람 - 김선우 시인 월경 때가 가까워오면 내 몸에서 바다 냄새가 나네 깊은 우물 속에서 계수나무가 흘러나오고 사랑을 나눈 달팽이 한쌍이 흘러나오고 재 될 날개 굽이치며 불새가 흘러나오고 내 속에서 흘러나온 것들의 발등엔 늘 조금씩 바다 비린내가 묻어 있네 무릎베개를 괴어주던 엄마의 몸냄새가 유독 물큰한 갯내음이던 밤바다 왜 그토록 조갈증을 내며 뒷산 아카시아 희디흰 꽃타래들이 흔들리곤 했는지 푸른 등을 반짝이던 사막의 물고기떼가 폭풍처럼 밤하늘로 헤엄쳐 오곤 했는지 알 것 같네 어머니는 물로 빚어진 사람 가뭄이 심한 해가 오면 흰 무명의 붉은, 월경 자국 선명한 개짐으로 깃발을 만들어 기우제를 올렸다는 옛이야기를 알 것 같네 저의 몸에서 퍼올린 즙으로 비를 만든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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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 신경림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2. 4. 09:02
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 신경림 시인 자리를 짜보니 알겠더란다 세상에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미끈한 상질 부들로 앞을 대고 좀 처지는 중질로는 뒤를 받친 다음 짧고 못난 놈들로는 속을 넣으면 되더란다 잘나고 미끈한 부들만 가지고는 모양 반듯하고 쓰기 편한 자리가 안 되더란다 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서러워진다 세상에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기껏 듣고 나서도 그 이치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내 미련함이 답답해진다 세상에 더 많은 것들을 휴지처럼 구겨서 길바닥에 팽개치고 싶은 내 옹졸함이 미워진다 - 랜덤하우스에서 2007년 나온 신경림 시화선집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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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는 순간을 기다린다 – 허만하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2. 1. 15:00
어제 방송된 의 "느낀 한 스푼"에서 소개된 詩이다. 오리는 순간을 기다린다 – 허만하 시인 청둥오리는 연푸른 수면 위에 목안처럼 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수면 밑에서 쉴 새 없이 물을 젓고 있다. 쌀쌀한 바람에 묻어있는 연두색 미나리 냄새를 가려내는 내 시린 코끝처럼, 귤빛 오리발은 시시각각 변하는 물의 온도를 재고 있다. 시베리아 고원 자작나무숲을 건너는 눈바람 소리를 찾아, 미지의 길을 날개 칠 순간을 기다리는 오리의 몸은 언제나 반쯤 수면 밑에 잠겨 있다. 한 번의 폭발을 위하여 화약가루가 머금고 있는 적막한 기다림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오리. 삭막한 겨울 풍경에 대한 그리움을 접은 날개 밑에 품은 채 오리들은 비취색 물빛 위를 고요히 흐르고 있다. 바람은 언제나 미래 쪽에서 불어온다. 기다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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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례 시간 – 도종환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2. 1. 14:11
종례 시간 – 도종환 시인 얘들아 곧장 집으로 가지 말고 코스모스 갸웃갸웃 얼굴 내밀며 손 흔들거든 너희도 코스모스에게 손 흔들어주며 가거라 쉴 곳 만들어주는 나무들 한 번씩 안아주고 가라 머리털 하얗게 셀 때까지 아무도 벗해 주지 않던 강아지풀 말동무해 주다 가거라 얘들아 돋장 집으로 가 만질 수도 없고 향기도 나지 않는 공간에 빠져 있지 말고 구름이 하늘에다 그린 크고 넓은 화폭 옆에 너희가 좋아하는 짐승들도 그려넣고 바람이 해바라기에게 그러듯 과꽃 분꽃에 입맞추다 가거라 애들아 곧장 집으로 가 방 안에 갇혀 있지 말고 잘 자란 볏잎 머리칼도 쓰다듬다 가고 송사리 피라미 너희 발 간질이거든 너희도 개울물 허리에 간지럼먹이다 가거라 잠자리처럼 양팔 날개 하여 고추밭에서 노을지는 하늘 쪽으로 날아가다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