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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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옷자락 - 신달자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19. 12:08
신달자 시인이 천주교 신자인 줄은 모르고 있었는데, 북촌이란 시집을 읽으면서 알게 되어, 신앙을 표현한 시인의 시 한 편을 아래에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도 없이 무례하게 소개한다. 영리 목적이 아닌만큼 양해하시리라 믿는다. 성모님의 옷자락 - 신달자 시인 이른 새벽 목력 꽃잎 하나 같은 문 열고 어둠 한 가닥 당깁니다 잡고 보니 성모님의 옷자락입니다 검은 어둠을 당긴 것인데 푸르스름한 청색 옷깃입니다 만집니다 마십니다 끌어안습니다 순간 오늘 다시 태어난 미움과 증오가 술술 풀려 흐릅니다 오늘 새벽에 태어난 미움과 증오는 아기 울음소리를 냅니다 내 마음의 몸의 매듭들이 따라웁니다 오후가 되면 미움과 증오도 나이가 듭니다 나이가 들기 전에 울음을 그치게 합니다 연한 새싹 같은 매듭들이 숨 쉴 때마다 말할 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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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신발 - 신달자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16. 11:54
헛신발 - 신달자 시인 여자 혼자 사는 한옥 섬돌 위에 남자 신발 하나 투박하게 놓여 있다 혼자 사는 게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남자 운동화에서 구두에서 좀 무섭게 보이려고 오늘은 큰 군용 신발 하나 동네에서 얻어 섬돌 중간에 놓아두었다 몸은 없고 구두만 있는 그는 누구인가 형체 없는 괴괴(怪鬼) 다른 사람들은 의심도 없고 공포도 없는데 아침 문 열다가 내가 더 놀라 누구지? 더 오싹 외로움이 밀려오는 헛신발 하나 민음의 시 227, 신달자 시집, 민음사, 2016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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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修養)대군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16. 11:48
수양(修養)대군 – 천양희 시인 수양대군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다 그는 웃음을 몰고 다닌다 바람을 일으키며 한바탕 몰려오는 그는 유독 분노를 분뇨라 하고 인품을 인분이라 발음한다 공분할 일이 생기면 분뇨의 폭발이 일어날 것 같다고 하고 인품 없는 사람을 보면 인분 냄새가 등천할 것 같다고 한다 말과 깊이 내통한 그를 보고 내심 반가웠다 그의 말이 웃음처럼 번지면 감동 없는 날을 베고 싶은 적도 있다 그는 뭉텅뭉텅 말이나 던져주면서 막힌 구멍을 숭숭 뚫어주지만 누가 똥을 싸줄 수 없듯이 누가 대신 화를 풀어주긴 어렵다고 능청을 떤다 인분이 퇴비의 재료가 되듯이 건강한 분노는 인품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아무 데서나 분노를 표시하는 건 공공장소에서 분뇨를 투척하는 일이라고 마음속에 분노가 쌓이면 그 인생은 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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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에 대하여 - 송경동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14. 12:14
아래의 시는 노동자 시인 송경동의 시이다. 사다리에 대하여 - 송경동 시인(1967- ) 살면서 참 많은 사다리를 올라보았다 어려선 주로 나무 사다리였다 생선 궤짝에서 뜯어낸 썩은 널빤지로 만든 사다리 써금써금 한두칸이 푹푹 주저앉던 사다리 가끔 산에서 쪄온 옹이 진 나무들로 만든 삐뚤빼뚤 운치 나던 사다리 아시바를 잘라 용접으로 붙여 만든 사다리 오래되면 용접 부위가 떨어져 위험하던 사다리 쇠파이프에 목재를 대 목기시대와 철기시대가 어색하게 만나던 사다리 아무리 굵은 철사로 묶어놓아도 금세 능청맞게도 칸칸 간격이 달라지던 사다리 큰 공장 굴뚝에 아예 붙어 있던 사다리 겨울이 되면 손이 쩍쩍 달라붙던 사다리 허공에 철길처럼 평형으로 위태롭게 놓여 있어 매번 목숨을 내놓고 달달 떨며 건너야 하던 사다리 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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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며 – 도종환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9. 13:59
산을 오르며 – 도종환 시인 산을 오르기 전에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오르막길에서 가파른 숨 몰아쉬다 주저앉지 않고 내리막길에서 자만의 젠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평탄한 길에서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잠시 무거운 다리를 그루터기에 걸치고 쉴 때마다 계획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서는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두 갈래 길 중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를 때도 당황하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도 세심히 살펴 길 찾아가게 하소서 늘 같은 보폭으로 걷고 언제나 여유 잃지 않으며 등에 진 짐 무거우나 땀 흘리는 일 기쁨으로 받아들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매여 있지 않고 오르는 길 굽이굽이 아름다운 것들 보고 느끼어 우리가 오른 봉우리도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가장 높이 올라설수록 가장 외로운 바람과 만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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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벤치에서 9 – 최재형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9. 13:34
아래의 詩는 오늘 아침 라디오 에서 "느낌 한 스푼"이란 코너에서 소개된 시라서, 검색을 해보았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가을과 맞아떨어지는 조금 우수와 비애가 느껴지는 詩이다. 공원 벤치에서 9 – 최재형 시인 벤치에 혼자 앉아 있으면 문득 함께 살던 식구들 생각이 난다 지금은 내 곁을 다 떠나가고 없는 그 식구들이 아내는 산에 갖다 묻고 자식놈은 분가해서 나가 살고 딸년들은 모두 제 짝을 만나 남의 식구가 돼 가고 나는 지금 혼자 살고 있다 어쩌다 한 자리에 모일 때가 있으면 이미 그들은 이전의 내 가족이 아니다 인제는 다들 내 마음 밖에서 살고 있다 이제 내게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세월이 마지막으로 내놓는 절박한 문제가 있다 이런 딱한 사정을 노인들은 서로 말하지 않는다 그냥 하늘만 쳐다보고 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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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 김종해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5. 13:30
텃밭 - 김종해 시인 내가 뿌린 씨앗들이 한여름 텃밭에서 자란다 새로 입적한 나의 가족들이다 상추 고추 가지 호박 딸기 토마토 옥수수 등의 이름 앞에 김씨 성을 달아준다 김상추-김고추-김가지-김호박-김딸기--- 호미를 쥔 가장의 마음은 뿌듯하다 내 몸 잎사귀 가장자리마다 땀방울이 맺힌다 흙 속에 몸을 비끄러매고 세상을 훔쳐보는 눈, 잡초의 이름 앞에도 김씨 성을 달아준다 잡초를 뽑아내는 내 손이 멈칫거린다 김잡초, 그러나 나는 단호하다 늘어나는 식구들 때문에 가장은 바쁘다 흙의 뜻을 하늘에 감아올리는 가장은 바쁘다 오늘은 아버지께 한나절 햇빛을 더 달라고 한다 목마른 내 가족들에게 한 소나기 퍼부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아아, 살아 있는 날의 기도여! 문학세계사, 2002년, 김종해 시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