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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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는 덫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2. 1. 14:09
시라는 덫 – 천양희 시인 쓸쓸한 영혼이나 편들까 하고 슬슬 쓰기 시작한 그날부터 왜 쓰는지를 안다는 말 생각할 때마다 세상은 아무나 잘 쓸 수 없는 원고지 같아 쓰고 지우고 다시 쓴다 쓴다는 건 사는 것의 지독한 반복 학습이지 치열하게 산 자는 잘 씌어진 한 페이지르 갖고 있지 말도 마라 누가 벌받으러 덫으로 들어가겠나 그곳에서 나왔겠나 지금 네 가망(可望)은 죽었다 깨어나도 넌 시밖에 몰라 그 한마디 듣는 것 이제야 알겠지 나의 고독이 왜 아무 거리낌 없이 너의 고독을 알아보는지 왜 몸이 영혼의 맨 처음 학생인지 천양희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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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소식 – 도종환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26. 22:43
꽃소식 – 도종환 시인 날이 풀리면 한번 내려오겠다곤 했지만 햇살 좋은 날 오후 느닷없이 나타나는 바람에 물 묻은 손 바지춤에 문지르며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하듯 나 화사하게 웃으며 나타난 살구꽃 앞에 섰네 헝클어진 머리 빗지도 않았는데 흙 묻고 먼지 묻은 손 털지도 않았는데 해맑은 얼굴로 소리 없이 웃으며 기다리던 그이 문 앞에 와 서 있듯 백목련 배시시 피어 내 앞에 서 있네 몇 달째 소식 없어 보고 싶던 제자들 한꺼번에 몰려와 재잘대는 날 내가 더 철없이 들떠서 떠들어쌓는 날 그날 그 들뜬 목소리들처럼 언덕 아래 개나리꽃 왁자하게 피었네 나는 아직 아무 준비도 못 했는데 어이 이 일을 어떠나 이렇게 갑자기 몰려오면 어쩌나 개나리꽃 목련꽃 살구꽃 이렇게 몰려오면 어쩌나 도종환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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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 도종환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25. 12:35
소리 – 도종환 시인 걸음을 멈추고 나무 그늘로 들어서니 건넛산 뻐꾸기 소리가 들린다 웃옷 단추를 끄르니 엷은 바람이 손바닥으로 살을 쓰다듬으며 들어오고 걸음을 멈추고 저녁 하늘 올려다보니 음악학원 열린 창 틈을 빠져나온 첼로의 낮은 음이 바람의 활을 타고 내려와 귀를 적신다 내 목소리 너무 클 때는 빗소리 물결 소리도 안 들리더니 말을 멈추니 가까운 이의 한숨 소리에 섞여 있는 솔바람 소리도 들리고 가야 할 길만 생각할 때는 들리지 않던 소리가 멈추니 들린다 속도의 등을 타고 달릴 대 못 듣던 소리가 속도를 버리니 비로소 들린다 도종환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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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되기까지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25. 12:33
이처럼 되기까지 - 천양희 시인 복사꽃 지고 나면 천랑성별이 뜬다지요 아침 무지개는 서쪽에 뜨고 저녁 무지개는 동쪽에 뜬다지요 8초에 103음을 내면서 숲을 노래로 꽉 채우는 새가 있다지요 한 뿌리 여러 갈래인 나무에도 결이 있다지요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지요 누워 있던 땅이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벌떡 일어선 것이 가로수라지요 잘못 자란 생각 끝에 꽃이 핀다지요 그것이 詩라지요 이 세상에 옛 애인은 없고 세상의 꽃은 모두 아슬아슬하다지요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다지요 사랑할 때 사랑하고 생각할 때 생각하라지요 가난에는 과거가 없고 간절함에는 놀라운 에너지가 있다지요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은 점덤 멀어진다지요 다음 어둠이 올 때까지 아직 시간은 있다지요 이처럼 되기까지 인생은 얼마나 수고로웠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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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지는 날 – 도종환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24. 14:42
꽃 지는 날 – 도종환 시인 슬프지만 꽃은 집니다 흐르는 강물에 실려 아름답던 날은 가고 바람 불어 우리 살에도 소리 없이 금이 갑니다 사시사철 푸른 나무로 살고자 하던 그대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그대에게 꽃 지는 날이 찾아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대 이기고 지고 또 지기 바랍니다 햇살로 충만한 날이 영원하지 않듯이 절망 또한 영원하지 않습니다 가지를 하늘로 당차게 뻗는 날만이 아니라 모진 바람에 가지가 꺾이고 찢겨진 꽃들로 처참하던 날들이 당신을 더욱 깊게 할 것입니다 슬프지만 피었던 꽃은 반드시 집니다 그러나 상처와 아픔도 아름다운 삶의 일부입니다 도종환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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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음 - 김용국 시인(1952-)현대시/한국시 2023. 11. 24. 13:52
아래의 詩는 어제 의 "느낌 한 스푼"에서 소개된 詩이다. 짧막하지만 의미심장해서 나는 이 詩가 좋다. 기울음 - 김용국 시인(1952-) 공기가 기울면 바람입니다 물이 기울면 파도입니다 땅이 기울면 산, 산맥입니다. 마음이 기울면 그리움 그리움이 기울면 당신입니다 시인 소개 김용국 시인은 1952년 보성에서 태어났다. 교사로 오랫동안 근무했다. 링크: http://www.chkorea.news/news/articleView.html?idxno=6005 날마다 해를 마신다 - 채널코리아뉴스 고향 보성에서 문학의 향기를 펼치는 김용국 시인을 만났다. 가벼운 악수였지만 수많은 접점이 생겼다. 김용국 시인은 1... www.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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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살의 인터뷰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23. 22:21
일흔 살의 인터뷰 – 천양희 시인 나는 오늘 늦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세월은 피부의 주름살을 늘리고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었냐고 입술에 바다를 물고 그가 물었을 때 나는 내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노을이며 파도며 다른 무엇인가 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늘 실패했거든요 정열의 상실은 주름살을 늘리고 서쪽은 노을로 물들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았냐고 해송을 붙들고 그가 물었을 때 희망을 버리니까 살았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내일에 속는 것보다 세월에 속는 것이 나았거든요 꽃을 보고 슬픔을 극복하겠다고 기울어지는 해를 붙잡았습니다 당신은 어느 때 우느냐고 파도를 밀치며 그가 물었을 때 행복을 알고도 가지지 못할 때 운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보일까 말까 한 작은 간이역이 행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