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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언11-물은 물대로 / 권달웅 (1944-) <초록세상>에서 누가 소리 높여 외치지 않아도 물은 물대로 흐르고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새겨서 다 듣는다. 누가 소래 높여 외치지 않아도 산은 산대로 돌아가고 그 소리를 아는 사람은 짐작해 다 안다. 누가 소리 높여 외치지 않아도 물따라 산따라 순리대로 ..
꽃 / 나태주 (1945-) 1 만약 내편에서 프로포즈라도 한다면 고려해 보겠노라는 여자야, 만약 얼빠진 정신으로 내 그대에게 프로포즈라도 한다면 그때 그대는 단호히 나의 청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발끈 화를 내며 절교라도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대는 내게 있어 더 ..
묘비명 (墓碑銘) / 김 광 규 (1941-) 한 줄의 시는 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
가을 서한 1 / 나태주 (1945-) <우리 젊은 날의 사랑아>에서 1 끝내 빈 손 들고 돌아온 가을아, 종이기러기 한 마리 안 날아오는 비인 가을아, 내 마음까지 모두 주어버리고 난 지금 나는 또 그대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 몰라. 2 새로 국화잎세 따다 수놓아 새로 창호지문 바르고 나면 방안 구석구석까..
입추 / 나태주 (1945-) <우리 젊은 날의 사랑아>에서 주린 배 구부려 줄줄이 동구 밖까지 따라나서는 미루나무들의 저녁에, 다리 오그려 쌔액쌔액 암행하는 겁 많은 일렬 기러기들의 저녁에, 징소리 앞세워 보름달님 데불고 나오시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신가. 눈도 코도 모르는 시커먼 하늘의 참대밭..
우언3-조롱박을 보면 / 권달웅 (1944-) <초록세상>에서 잎이 타면서 여름내 아파트 쇠창살을 타고 오른 조롱박이 익었다. 악착같이 악을 쓰고 기어오른 조롱박을 보면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일고 손으로 쓰다듬고 싶어지고 벽에 걸어놓고 싶어지고 물에 띄워놓고 싶어진다. 꾸밈없이 사는..
사투리 / 박목월 (1916-1978) 우리 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러운 악센트로 오오라베 부르면 나는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 나는 머루처럼 투명한 밤하늘을 사랑했다 그리고 오디가 새까만 뽕나무를 사랑했다. 혹은 울타리 섶에 피는 이슬마꽃 같은 것을...... 그런 것은 나..
초승달 / 나태주 (1945-) <우리 젊은 날의 사랑아>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는 더 만날 수 없는 너. 빗속에 마주 보며 울 수도 없는 너. 어디 갔다 이제야 너무 늦게 왔니? 흰구름도 사위어지고 나뭇잎도 갈리고 그 신명나던 왕머구리 풍각쟁이들도 다 사라져 가고 마지막으로 눈이 내린 지금, 서슬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