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들리는 것들 - 나희덕 (1966-)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는 있어 마른 쑥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 송이가 허리를 휘이청 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 해 가을인들 온통 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
감처럼 / 권달웅 (1944-) <초록세상>에서 가랑잎 더미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훤한 하늘에는 감이 익었다. 사랑하는 사람아 긴 날을 잎피워 온 어리석은 마음이 있었다면 사랑하는 사람아 해지는 하늘에 비웃음인 듯 네 마음을 걸어놓고 가거라. 눈웃음인 듯 내 마음을 걸어놓고 가거라. 찬서리 ..
고향길 / 권달웅 (1944-) <초록세상>에서 여보게, 고향에 오려면 덜컹거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오게. 콩밭을 지나 호박밭을 지나 인분내를 맡으며 양복을 벗고 옛 길로 낡은 밀짚모를 쓰고 오게. 여보게, 고향에 오려면 모든 사람과 욕심을 버리고 흙 묻은 손 그대로 오게. 넉세 삼베옷 입은 옛 모습 그..
요즘의 발견 / 나희덕 (1966- ) 잊은 듯이 한참 있다가 뚜껑을 열면 솥바닥에 자리잡은 절망의 크기만큼 온전한 한 덩이의 누룽지가 안간힘으로 솟아올라 있다 구수한 누룽지 한 조각 만드는 것이 요즘 나의 즐거움이다 누룽지를 들어내고 환한 솥바닥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 요즘 나의 발견이다
대숲 아래서 / 나태주 (1945-) <우리 젊은 날의 사랑아>에서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득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
초록세상 / 권달웅 (1944-) <초록세상>에서 도시를 떠나면 초록 세상이다. 도시를 떠난 사람들은 옷을 벗어던지고 밀짚모를 쓴다. 흙내 풀내가 물씬거리는 초록 세상에 젖어, 아내는 소나무숲에 들어가 삼림욕을 즐기고 나는 풀밭에 누워 일광욕을 즐긴다. 아무도 만나지 아니한 맑고 푸른 바람이 소..
몸 / 조향미 (1961-) -실천문학 시집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에서- 시답잖은 인생살이 그나마 고마운 것 중 하나는 마음을 생짜로 노천에 내놓진 않아도 된다는 것 몸이라는 황송한 제 집이 있어서 벌거숭이 마음 담아둘 수 있다는 것이다 예고 없이 몰아붙이는 폭풍에 찢겨 거둘 수도 없는 ..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정채봉 (1946-2001) 모래알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풀잎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너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에 없어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 정채봉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샘터, 2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