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病床錄 / 김관식 (1934-1970) <시가 내게로 왔다>에서 병명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으며 모져 노운 지 이제 10년. 고속도로는 뚫려도 내가 살 길은 없는 것이냐. 肝, 心, 脾, 肺, 腎…… 오장이 어디 한 군데 성한 데 없이 생물학 교실의 골격 표본처럼 뼈만 앙상한 이 극한 상황에서…… 어두운 밤 턴넬..
병상우음(病床偶吟)1 / 구상 (1919-2004) <인류의 맹점(盲點)>에서 병상에서 내다보이는 잿빛 하늘이 저승처럼 멀고도 가깝다 돌이켜보아야 80을 눈앞에 둔 한평생 승(僧)도 속(俗)도 못 되고 마치 옛 변기에 앉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살아왔다 이제 허둥대 보았자 부질없는 노릇… 어느 호스피스 여의사..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하소서 / 밝은하늘 2009/07/10(금) 나이가 먹을수록 더 많은 부고를 접하고 장례식장을 찾아 돌아가신 분을 위해 연도를 바치고 술잔을 기울이고 내 마지막을 생각한다 장례식장은 망자를 떠나보내는 이별의 장소 망자와 헤어지는 송별의 장소 그러나 동시에 마지막으로 망자와 만..
양심 / 박원자 <하늘빛 너의 향기>에서 어느 날 누군가는 당신 가슴 속에 양심의 불꽃은 끄지 말라했었네 고속도로 위에 종일 쥐고 있던 조그마한 양심 하나 그만 창문 열고 슬쩍 바람에 날려 보냈네. 저만큼 안녕을 고하며 잘도 날아가던 양심 어젯밤 잠들 때까지 날 따라 다니더니 오늘 아침에도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1930-1969)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
히말라야의 새 / 류시화 (1958-)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에서 히말라야 기슭 만년설이 바라보이는 해발 이천오백 미터 고지대의 한적한 마을에서 한낮의 햇살이 매서운 눈처럼 쏘아보는 곳에서 나는 보았다 늙은 붉은머리 독수리 한 마리 먹이를 찾아 천천히 공중을 선회하다가 까마귀 몇 마리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1941-) <대장간의 유혹>에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
시장에서 / 박원자 <하늘빛 너의 향기>에서 고추 장단지에 더덕이 안 보여 이른 아침 달려 간 시장 오늘 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인정 많은 아줌마되어 다 사주고 싶다 검버섯이 얼굴 가득한 저 할머니 풀이 죽어있는 저 아저시 까맣게 그을려 나이를 알 수 없는 키 작은 아줌마도 자기 것은 꼭 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