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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요기 / 조영석 (1976-) <선명한 유령>에서 승객보다 좌석이 더 많은 오후의 지하철 스포츠지가 주인을 잃고 에어컨 바람에 펄럭인다. 벌거벗은 여자들을 갈피마다 숨겨두고 슬쩍슬쩍 보여준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고개를 젖히며 살 오른 목의 주름을 편다. 나는 읽던 책 사이에 간지(間紙)를 은..
눈물은 왜 짠가 / 함민복 (1962-)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
누더기별 / 정호승 (1950-) 1997년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중에서 사람이 다니는 눈길 위로 누더기가 된 낙엽들이 걸어간다 낙엽이 다니는 눈길 위로 누더기가 된 사람들이 걸어간다 그 뒤를 쓸쓸히 개미 한 마리 따른다 그 뒤를 쓸쓸히 내가 따른다 누더기가 되고 나서 내 인생이 편안해졌다 누더..
누가 주인인가 / 이생진 (1929- ) <그리운 바다 성산포>에서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를 보고 있는 고립 성산포에서는 주인을 모르겠다 ..
한 잎의 女子 / 오규원 (1941-2007)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
너의 하늘을 보아 / 박노해 (1958-)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1961- )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출전-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 1994 --------- 짧지만 여운이 많이 남는 시였다. 중년기 들어 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무렵에 만났던 시였다.ㅠ 그리고 시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
<남해금산>후기 / 이성복 (1952-) 처음 당신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이젠 기억조차 까마득하군요. 당신을 처음 알았을 때, 당신이라는 분이 이 세상에 계시는 것만 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여러 날 밤잠을 설치며 당신에게 드리는 긴 편지를 썼지요. 처음 당신이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