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에게 / 김동환 (1901-1958) 오랜 열병 끝에 솟아난 그리움의 지문 사랑이여 함부로 지지 말아라.
꽃의 말 / 황금찬 (1918-) 사람아 입이 꽃처럼 고아라 그래야 말도 꽃같이 하리라 사람아 혹 꽃같지 않은 말일랑 가는 목이 메더라도 꿀꺽 삼켜라 줄기로 뿌리로 내려간 슬픔이 썩어 퇴비가 되어 더 고운 꽃을 피우게 하라 사람아
꽃을 보려면 / 정호승 (1950-) 중에서 꽃을 보려면 – 정호승 시인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꽃 / 최규장 생각해 보면 꽃은 아늑한 안개 속에 피는 것이 아니라 감미로운 산들바람 속에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찬 바람 속에 살을 녹이는 땡볕 속에 피어나네. 그렇네. 꽃은 상처 속에 피네. 아픔이 클수록 꽃은 더욱 빛나네. 그래도 사람들은 꽃이 아름답다고 하네. 시도 그러하네 상처 속에서 싹..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1930-1969)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
까마귀의 길 / 유안진 (1941- ) 어두워야 보인다지 눈을 감고 기도하는 까닭이라지 토굴 속에 들어가서 도(道) 닦는 까닭이라지 하늘의 달도 밤길을 더 잘 가는 까닭이라지 선견자 중에 맹인이 많은 까닭이라지 영험할 수록 판수(判數)가 많은 까닭이라지 불을 끄고 눈마저 감아야 대낮에 잃은 길도 찾아..
까닭 / 정호승 (1950-)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중에서 내가 아직 한 포기 풀잎으로 태어나서 풀잎으로 사는 것은 아침마다 이슬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 한 송이 눈송이로 태어나서 밤새껏 함박눈으로 내리는 ..
개 밥그릇 / 이명수 (1945-) 잠자리 한 마리 개 밥그릇에 빠졌다 젖은 날개 파득이며 필사적이다 생사가 가을비 한 모금에 있구나 조심스럽게 꺼내 풀섶에 놓아주었다 한참을 더 들여다보았다 텅 빈 개 밥그릇에 가을 하늘이 가득하다 가을이 개 밥그릇 안에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