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벽 위 나무 십자가 / 김성춘 성당 첨탑 위 흰 구름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다 성당 오르는 오솔길 눈부신 들국화 한 송이 얼굴 내밀고 저녁놀이 피어 있다, 폐허처럼, 새들이 노을의 손 잡고 오솔길로 오고 있다. 바람이 분다 낡은 나무 십자가 하나 묵상에 잠겨 있다 가을 하늘 속에 깊이 ..
여덟 번째 고백성사 / 김여정 <시와 십자가>에서 천주여, 그날 저녁 무렵엔 당신의 등 뒤에서 비가 참 많이도 내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서 계시던 다리 아래 강물도 그 강물 속 하늘도 그 하늘의 당신 머리칼도 온통 비에 젖어 흐르고 있었습니다. 천주여, 당신은 다 알고 계셨지요. ..
바닥을 친다는 것에 대하여 / 주용일 (1964-2015) <꽃과 함께 식사>에서 모든 수직이 수평으로 눕는 바닥은 세상에 널려 있지만 진정으로 바닥을 칠 줄 아는 이는 드물다 바닥을 슬픔으로 칠 때 통곡은 통곡다워지고 웃음은 뛸 듯한 기쁨이 되기도 한다 길바닥이나 지하도 바닥 같은 생의..
꽃과 함께 식사 / 주용일 (1964- 2015) <꽃과 함께 식사>에서 며칠 전 물가를 지나다가 좀 이르게 핀 쑥부쟁이 한 가지 죄스럽게 꺾어왔다 그 여자를 꺾은 손길처럼 외로움 때문에 내 손이 또 죄를 졌다 홀로 사는 식탁에 꽂아놓고 날마다 꽃과 함께 식사를 한다 안 피었던 꽃이 조금씩 피..
목련 / 정호승 (1950-)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중에서 목련은 피고 아들은 죽었다 진흥가슴새의 가슴에 피가 흐른다 흰나비 한 마리가 눈물을 떨구고 간다 나는 고속도로 분리대 위에 쓰러져 잠이 든다 술취한 마음은 찢겨져 갈기갈기 도마뱀처럼 달아나고 고맙게도 새벽에는 봄비가 ..
봄비 / 이수복 (1924-1986) 이 비 그치며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재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
부부 / 함민복 (1962-)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