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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등뼈 / 정끝별 (1964-)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께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
洗足式을 위하여 / 정호승 (1950- )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중에서 사랑을 위하여 사랑을 가르치지 마라 세족식을 위하여 우리가 세상의 더러운 물 속에 계속 발을 담글지라도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마라 지상의 모든 먼지와 때와 고통의 모든 눈물과 흔적을 위하여 ..
영기의 십자가 / 형문창 (1947-) <詩와 십자가>에서 내일은 주일입니다. 영기는 날이 어서 밝기를 기다리며 골목길에 나와 교회 쪽을 바라봅니다. 어린이 교리를 들으면 주는 빵 한 개를 일주일 내내 기다린 영기입니다. 언비를 못 내서 쫓겨난 유아원이 있는 교회지만 주일날은 원비와 상관없이 빵..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 정호승 (1950- )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 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
밤의 십자가 / 정호승 (1950- ) 밤의 사울 하늘에 빛나는 붉은 십자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십자가마다 노숙자 한 사람씩 못 박혀 고개를 떨구고 있다 어떤 이는 아직 죽지 않고 온몸을 새처럼 푸르르 떨고 있고 어떤 이는 지금 막 손과 발에 못질을 끝내고 축 늘어져 있고 또 어떤 이는 옆구..
나무 / 정운헌 <詩와 십자가>에서 저 나무들이 행복해 보였어요 무성한 꽃과 잎들 그늘이 짙었지요 한없이 바람에 출렁이고 햇빛에 반짝였어요 저도 함게 출렁이고 반짝이고 싶었어요. 겨울이 되어서야 저는 보았어요 나뭇가지마다 십자가가 아닌 것이 없고 온몸으로 그 나뭇가지들..
내 젊음을 앗아간 탄전지대[나의 문학, 나의 삶] 나는 화전민火田民의 아들이었다. ‘화전민’이란 들판에 땅이 없어 산골짝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궈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이사를 갔는데, 화전민이 되기 위해서였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
움직이는 십자가 / 임지현 깊이 패인 주름살 십자가를 그었다. 거슬러가는 시간 앞에 무릎 꿇고 팽팽한 이미 위에 잔금을 새기면서 새롭게 일어서는 아침 햇살 앞에 살땀을 흘리면서 허리 굽힌 삽질 흥건한 고단함을 구들장에 눕힌 날들 흠 없이 가는 시간 붙잡지 못했다. 일월이 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