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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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시작법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2. 7. 12:04
시작법 – 천양희 시인 구름과 비는 짧은 바람에서 생겨나고 긴 강은 얕은 물에서 시작된다 모든 시작들은 나아감으로 되돌릴 수 없고 되풀이는 모든 시작(詩作)의적이므로 문장을 면면이 뒤져보면 표면과 내면이 다른 면(面)이 아니란 걸 정면과 이면이 같은 세계의 앞과 뒤라는 걸 알게 된다 내면에서 신비롭게 걸어 나온 말맛들! 말의 맛으로 쓸 수 없는 것을 위해 쓴다고 반복해서 말하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혼자 걸을 때 발걸음이 더 확실해진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이미 쓴 것들은 써봐야 소용없고 이미 잘못 쓴 문장들은 엎질러진 물과 같아 무슨 작법으로 자연을 받아쓰고 무슨 독법으로 사람을 받아 읽기나 할까 모든 살아 있는 시의 비결은 시작에 있다고? 시작의 비결은 어떤 복잡한 문장이라도 짧은 줄로 나누어 첫 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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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에서 - 이성부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2. 7. 11:59
아래의 詩는 오늘 아침 에서 소개된 시이다. 산길에서 - 이성부 시인 이 길을 만든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 지금조릿대 밭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 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 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옛 내음이라도 맡고 싶어 나는 자꾸 집을 떠나고 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 나지 않았더냐 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 힘이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 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 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더라도 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길 따라 그이들 따라 오르는 일 이리 힘들고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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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개인 날 - 노향림 시인(1942-)현대시/한국시 2023. 12. 5. 19:19
어떤 개인 날 - 노향림 시인(1942-) 낣고 외진 첨탑 끝에 빨래가 위험하게 널려 있다. 그곳에도 누가 살고 있는지 깨끗한 햇빛 두어 벌이 집게에 걸려 펄럭인다. 슬픔이 한껏 숨어 있는지 하얀 옥양목 같은 하늘을 더욱 팽팽하게 늘인다. 주교단 회의가 없는 날이면 텅 빈 돌계단 위에 야윈 고무나무들이 무릎 꿇고 황공한 듯 두 손을 모은다. 바람이 간혹 불어오고 내 등뒤로 비수처럼 들이댄 무섭도록 짙푸른 하늘. - 다산책방에서 펴낸 신경림이 엮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