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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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 신경림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2. 4. 09:02
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 신경림 시인 자리를 짜보니 알겠더란다 세상에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미끈한 상질 부들로 앞을 대고 좀 처지는 중질로는 뒤를 받친 다음 짧고 못난 놈들로는 속을 넣으면 되더란다 잘나고 미끈한 부들만 가지고는 모양 반듯하고 쓰기 편한 자리가 안 되더란다 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서러워진다 세상에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기껏 듣고 나서도 그 이치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내 미련함이 답답해진다 세상에 더 많은 것들을 휴지처럼 구겨서 길바닥에 팽개치고 싶은 내 옹졸함이 미워진다 - 랜덤하우스에서 2007년 나온 신경림 시화선집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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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는 순간을 기다린다 – 허만하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2. 1. 15:00
어제 방송된 의 "느낀 한 스푼"에서 소개된 詩이다. 오리는 순간을 기다린다 – 허만하 시인 청둥오리는 연푸른 수면 위에 목안처럼 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수면 밑에서 쉴 새 없이 물을 젓고 있다. 쌀쌀한 바람에 묻어있는 연두색 미나리 냄새를 가려내는 내 시린 코끝처럼, 귤빛 오리발은 시시각각 변하는 물의 온도를 재고 있다. 시베리아 고원 자작나무숲을 건너는 눈바람 소리를 찾아, 미지의 길을 날개 칠 순간을 기다리는 오리의 몸은 언제나 반쯤 수면 밑에 잠겨 있다. 한 번의 폭발을 위하여 화약가루가 머금고 있는 적막한 기다림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오리. 삭막한 겨울 풍경에 대한 그리움을 접은 날개 밑에 품은 채 오리들은 비취색 물빛 위를 고요히 흐르고 있다. 바람은 언제나 미래 쪽에서 불어온다. 기다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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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례 시간 – 도종환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2. 1. 14:11
종례 시간 – 도종환 시인 얘들아 곧장 집으로 가지 말고 코스모스 갸웃갸웃 얼굴 내밀며 손 흔들거든 너희도 코스모스에게 손 흔들어주며 가거라 쉴 곳 만들어주는 나무들 한 번씩 안아주고 가라 머리털 하얗게 셀 때까지 아무도 벗해 주지 않던 강아지풀 말동무해 주다 가거라 얘들아 돋장 집으로 가 만질 수도 없고 향기도 나지 않는 공간에 빠져 있지 말고 구름이 하늘에다 그린 크고 넓은 화폭 옆에 너희가 좋아하는 짐승들도 그려넣고 바람이 해바라기에게 그러듯 과꽃 분꽃에 입맞추다 가거라 애들아 곧장 집으로 가 방 안에 갇혀 있지 말고 잘 자란 볏잎 머리칼도 쓰다듬다 가고 송사리 피라미 너희 발 간질이거든 너희도 개울물 허리에 간지럼먹이다 가거라 잠자리처럼 양팔 날개 하여 고추밭에서 노을지는 하늘 쪽으로 날아가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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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는 덫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2. 1. 14:09
시라는 덫 – 천양희 시인 쓸쓸한 영혼이나 편들까 하고 슬슬 쓰기 시작한 그날부터 왜 쓰는지를 안다는 말 생각할 때마다 세상은 아무나 잘 쓸 수 없는 원고지 같아 쓰고 지우고 다시 쓴다 쓴다는 건 사는 것의 지독한 반복 학습이지 치열하게 산 자는 잘 씌어진 한 페이지르 갖고 있지 말도 마라 누가 벌받으러 덫으로 들어가겠나 그곳에서 나왔겠나 지금 네 가망(可望)은 죽었다 깨어나도 넌 시밖에 몰라 그 한마디 듣는 것 이제야 알겠지 나의 고독이 왜 아무 거리낌 없이 너의 고독을 알아보는지 왜 몸이 영혼의 맨 처음 학생인지 천양희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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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習作詩)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에는 - 밝은 하늘현대시/습작시 2023. 11. 29. 21:13
오늘 진눈깨비가 내리는 낮에 거리를 걷다보니 한 여인이 엄청 보고 싶었다. 그 심정을 몇 줄로 표현이 가능할 지 모르겠으나, 더 아름답게, 더 멋지게 표현하고 싶은 데 아쉬울 뿐이다. 어머니란 존재는 모든 아들에게 특별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고, 그 그리움도 일순간이지만 행복이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에는 2023년 11월 29일 수요일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에는 그대가 보고 잡습니다. 아픈 몸 휠체어 태워 택시도 타고 바람도 타고 병원도 다녀오고 오순도순 식당에서 곰탕도 먹고 때론 가슴에 비수를 꼽는 모진 말도 던지고 헤어질 때 기도도 해드리고 안아드렸던 나의 영원한 연인 兪 율리안나 여사님 좀만 기다려 주십시오 한 삼십 년 후에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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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소식 – 도종환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26. 22:43
꽃소식 – 도종환 시인 날이 풀리면 한번 내려오겠다곤 했지만 햇살 좋은 날 오후 느닷없이 나타나는 바람에 물 묻은 손 바지춤에 문지르며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하듯 나 화사하게 웃으며 나타난 살구꽃 앞에 섰네 헝클어진 머리 빗지도 않았는데 흙 묻고 먼지 묻은 손 털지도 않았는데 해맑은 얼굴로 소리 없이 웃으며 기다리던 그이 문 앞에 와 서 있듯 백목련 배시시 피어 내 앞에 서 있네 몇 달째 소식 없어 보고 싶던 제자들 한꺼번에 몰려와 재잘대는 날 내가 더 철없이 들떠서 떠들어쌓는 날 그날 그 들뜬 목소리들처럼 언덕 아래 개나리꽃 왁자하게 피었네 나는 아직 아무 준비도 못 했는데 어이 이 일을 어떠나 이렇게 갑자기 몰려오면 어쩌나 개나리꽃 목련꽃 살구꽃 이렇게 몰려오면 어쩌나 도종환 시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