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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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수제비 - 남재만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20. 23:32
오늘 아침 의 "느낌 한 스푼"에서 소개된 詩이다. 물수제비 - 남재만 시인 아내의 회갑 날 아이들과 함께 모처럼 바닷가를 찾았다 물이 하도 맑고 잔잔해 난 조약돌을 주워 오랫만에 물수제빌 떠 봤다 그러나 기껏 두세 번 담방거리고는 이내 갈앉아버리는 조약돌 내 어줍잖은 솜씰 보다 말고 아내는 웃으며 이제 그만 하고 가자고 했지만 난 막무가내 던지고 또 던졌다 물수제비 아홉 개가 용케도 물찬 제비처럼 바다 위를 미끌어질 때까지 아내는 알까 몰라 많이도 말고 아흔 살까지만 건강히 살라는 내 아홉 개 물수제비의 속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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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머리에 서서 - 박목월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20. 12:10
밭머리에 서서 - 박목월 시인 저 빛나는 저 충만한 생명의 주인은 따로 계신다 저 충만한 생명의 주인은 따로 계신다 우리 이마 위에 해를 뜨게 하고 후끈한 사랑으로 가슴을 덥게 하고 촉촉히 비를 뿌리시는 아아 그분의 어지신 경영 너그러운 베푸심 너무나 벅찬 생명의 광휘에 나는 다만 넋을 잃을 뿐 저 황홀한 푸름 저 넘치는 자라남 나는 밭머리에 서서 밭 임자가 누굴까 생각한다. 명목상 밭 임자야 내가 틀림없지만 저 줄기찬 성장 저 황홀한 생명의 광휘 싱싱하게 빛나는 밭머리에 서서 나는, 밭 임자가 누굴까 명목상 밭 임자야 내가 틀림없지만 명목상 밭 임자야 내가 틀림없지만 무슨 힘으로 내가 생명을 눈 뜨게 하고, 땅 속에 뿌리를 펴게 하고, 저 잎사귀 하나마다 황홀한 광채를 베풀 것인가 나는 다만 어리석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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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옷자락 - 신달자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19. 12:08
신달자 시인이 천주교 신자인 줄은 모르고 있었는데, 북촌이란 시집을 읽으면서 알게 되어, 신앙을 표현한 시인의 시 한 편을 아래에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도 없이 무례하게 소개한다. 영리 목적이 아닌만큼 양해하시리라 믿는다. 성모님의 옷자락 - 신달자 시인 이른 새벽 목력 꽃잎 하나 같은 문 열고 어둠 한 가닥 당깁니다 잡고 보니 성모님의 옷자락입니다 검은 어둠을 당긴 것인데 푸르스름한 청색 옷깃입니다 만집니다 마십니다 끌어안습니다 순간 오늘 다시 태어난 미움과 증오가 술술 풀려 흐릅니다 오늘 새벽에 태어난 미움과 증오는 아기 울음소리를 냅니다 내 마음의 몸의 매듭들이 따라웁니다 오후가 되면 미움과 증오도 나이가 듭니다 나이가 들기 전에 울음을 그치게 합니다 연한 새싹 같은 매듭들이 숨 쉴 때마다 말할 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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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신발 - 신달자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16. 11:54
헛신발 - 신달자 시인 여자 혼자 사는 한옥 섬돌 위에 남자 신발 하나 투박하게 놓여 있다 혼자 사는 게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남자 운동화에서 구두에서 좀 무섭게 보이려고 오늘은 큰 군용 신발 하나 동네에서 얻어 섬돌 중간에 놓아두었다 몸은 없고 구두만 있는 그는 누구인가 형체 없는 괴괴(怪鬼) 다른 사람들은 의심도 없고 공포도 없는데 아침 문 열다가 내가 더 놀라 누구지? 더 오싹 외로움이 밀려오는 헛신발 하나 민음의 시 227, 신달자 시집, 민음사, 2016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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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修養)대군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16. 11:48
수양(修養)대군 – 천양희 시인 수양대군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다 그는 웃음을 몰고 다닌다 바람을 일으키며 한바탕 몰려오는 그는 유독 분노를 분뇨라 하고 인품을 인분이라 발음한다 공분할 일이 생기면 분뇨의 폭발이 일어날 것 같다고 하고 인품 없는 사람을 보면 인분 냄새가 등천할 것 같다고 한다 말과 깊이 내통한 그를 보고 내심 반가웠다 그의 말이 웃음처럼 번지면 감동 없는 날을 베고 싶은 적도 있다 그는 뭉텅뭉텅 말이나 던져주면서 막힌 구멍을 숭숭 뚫어주지만 누가 똥을 싸줄 수 없듯이 누가 대신 화를 풀어주긴 어렵다고 능청을 떤다 인분이 퇴비의 재료가 되듯이 건강한 분노는 인품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아무 데서나 분노를 표시하는 건 공공장소에서 분뇨를 투척하는 일이라고 마음속에 분노가 쌓이면 그 인생은 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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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에 대하여 - 송경동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14. 12:14
아래의 시는 노동자 시인 송경동의 시이다. 사다리에 대하여 - 송경동 시인(1967- ) 살면서 참 많은 사다리를 올라보았다 어려선 주로 나무 사다리였다 생선 궤짝에서 뜯어낸 썩은 널빤지로 만든 사다리 써금써금 한두칸이 푹푹 주저앉던 사다리 가끔 산에서 쪄온 옹이 진 나무들로 만든 삐뚤빼뚤 운치 나던 사다리 아시바를 잘라 용접으로 붙여 만든 사다리 오래되면 용접 부위가 떨어져 위험하던 사다리 쇠파이프에 목재를 대 목기시대와 철기시대가 어색하게 만나던 사다리 아무리 굵은 철사로 묶어놓아도 금세 능청맞게도 칸칸 간격이 달라지던 사다리 큰 공장 굴뚝에 아예 붙어 있던 사다리 겨울이 되면 손이 쩍쩍 달라붙던 사다리 허공에 철길처럼 평형으로 위태롭게 놓여 있어 매번 목숨을 내놓고 달달 떨며 건너야 하던 사다리 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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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며 – 도종환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9. 13:59
산을 오르며 – 도종환 시인 산을 오르기 전에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오르막길에서 가파른 숨 몰아쉬다 주저앉지 않고 내리막길에서 자만의 젠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평탄한 길에서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잠시 무거운 다리를 그루터기에 걸치고 쉴 때마다 계획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서는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두 갈래 길 중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를 때도 당황하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도 세심히 살펴 길 찾아가게 하소서 늘 같은 보폭으로 걷고 언제나 여유 잃지 않으며 등에 진 짐 무거우나 땀 흘리는 일 기쁨으로 받아들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매여 있지 않고 오르는 길 굽이굽이 아름다운 것들 보고 느끼어 우리가 오른 봉우리도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가장 높이 올라설수록 가장 외로운 바람과 만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