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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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첫사랑 – 김용택 시인(1948-)현대시/한국시 2023. 10. 27. 21:46
첫사랑 – 김용택 시인(1948-) 바다에서 막 건져올린 해 같은 처녀의 얼굴도 새봄에 피어나는 산중의 진달래꽃도 설날 입은 새옷도 아, 꿈같던 그때 이 세상 전부 같던 사랑도 다 낡아간다네 나무가 하늘을 향해 커가는 것처럼 새로 피는 깊은 산중의 진달래처럼 아, 그렇게 놀라운 세상이 내게 새로 열렸으면 그러나 자주 찾지 않은 시골의 낡은 찻집처럼 사랑은 낡아가고 시들어만 가네 이보게, 잊지는 말게나 산중의 진달래꽃은 해마다 새로 핀다네 거기 가보게나 삶에 지친 다리를 이끌고 그 꽃을 보러 깊은 산중 거기 가보게나 놀랄걸세 첫사랑 그 여자 옷 빛깔 같은 그 꽃빛에 놀랄걸세 그렇다네 인생은, 사랑은 시든 게 아니라네 다만 우린 놀라움을 잊었네 우리 사랑을 잃었을 뿐이네 김용택의 시집 , 문학동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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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바깥은 없다 - 도종환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0. 16. 10:53
희망의 바깥은 없다 – 도종환 시인 희망의 바깥은 없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 속에서 싹트다 얼고 시들어서 흙빛이 된 겨울 이파리 속에서 씀바귀 새 잎은 자란다 희망도 그렇게 쓰디쓴 향으로 제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지금 인간의 얼굴을 한 희망은 온다 가장 많이 고뇌하고 가장 많이 싸운 곪은 상처 그 밑에서 새살이 돋는 것처럼 희망은 스스로 균열하는 절망의 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자라난다 안에서 절망을 끌어안고 뒹굴어라 희망의 바깥은 없다 도종환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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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 이성선 시인(1941-2001)현대시/한국시 2023. 10. 16. 10:50
아래는 라디오 Happy FM의 中 "느낌 한 스푼"에서 오늘 소개된 詩이다. 언터넷에서 전문을 확인하여 타자해본다. 가을 편지 – 이성선 시인(1941-2001)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 빈 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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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목 - 복효근 시인(1962-)현대시/한국시 2023. 10. 9. 18:34
탁목 - 복효근 시인(1962-) 죄 많은 짐승이었을 것이다 닥따그르 딱따그르-- 새는 나무에 머리를 짓찧으며 울어야 했을 것이다 벌레나 잡아먹으며 연명해야 하는 생 고달프기도 했겠으나 숲에는 또 그와 같이 구멍 뚫린 나무토막 제 머리를 때리듯 자꾸만 때리며 딱 딱 딱 딱 딱따그르 딱따그르------- 벌레 같은 번뇌를 죽여 삼ㄱ키며 살아가는 생도 있다 깊은 숲에 들지도 못하고 저무는 숲길 언저리에서 딱따그르 딱 딱 딱따그르르---------- 그 소리에나 부딪쳐 가슴에 허공을 내며 이렇게 벌레처럼 아픈 생도 있다 복효근 시집 실천문학사, 2013년, 중에서 탁목: 딱따구릿과에 속한 새를 통틀어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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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 복효근 시인(1962-)현대시/한국시 2023. 10. 7. 23:47
늦가을 - 복효근 시인(1962-) 술 덜 깬 아침 한나절 약속 어긴 것 화 안 내고 혼자서 지리산 둘레길 산행 나가는 낡은 아내 미웁지 않다 혼자 돌아가는 음악 무슨 뜻인지 몰라 소프라노 낯선 나라 말 그냥 악기 소리처럼 싫지 않다 너무 많은 나에게 내가 지쳐서 전화 한 통 없는 이 쓸쓸함이 좀 오래갔으면 좋겠다 마당귀엔 산에서 옮겨 심은 용담 꽃잎 벌리는 의뭉스런 햇살 손길 내 몸이 간지럽다 벌 한 마리 꽃우물에 빠져 맴돌고 가만가만 진저리 쳐대는 꽃 저들의 한바탕 음화 같은 풍경에 때 아닌 내 거시기가 선다 무리에서 처져서 산다는 부끄럼 말고도 처진 자만이 아는 권태로운 즐거움도 있어 아주 먼, 여자를 떠올리며 수음을 했다 이 좀스러운 외도가 그리 죄스럽지 않은 마흔아홉 늦은 가을 복효근 시집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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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어의 못을 뽑고 - 복효근 시인(1962-)현대시/한국시 2023. 10. 7. 11:08
타이어의 못을 뽑고 - 복효근 시인(1962-) 사랑했노라고 그땐 또 어쩔 수 없었노라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를 너를 찾아 고백하고도 싶었다 -- 그것은 너나 나의 가슴에서 못을 뽑아버리고자 하는 일 그러나 타이어에 박힌 못을 함부로 잡아 뽑아버리고서 알았다 빼는 그 순간 피식피식 바람이 새어 나가 차는 주저앉고 만다 사는 일이 더러 그렇다 가슴팍에 대못 몇 개 박아둔 채 정비소로 가든지 폐차장으로 가든지 갈 데까지는 가는 것 갈 때까지는 가야 하는 것 치유를 꿈꾸지 않는 것 꿈꾼대도 결국 치유되지 않을 것이므로 대못이 살이 되도록 대못을 끌어안는 것 때론 대못이 대못 같은 것이 생이 새어 나가지 않게 그러쥐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복효근 시집 (주)실천문학, 2013,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