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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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 이성선 시인(1941-2001)현대시/한국시 2023. 10. 16. 10:50
아래는 라디오 Happy FM의 中 "느낌 한 스푼"에서 오늘 소개된 詩이다. 언터넷에서 전문을 확인하여 타자해본다. 가을 편지 – 이성선 시인(1941-2001)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 빈 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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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목 - 복효근 시인(1962-)현대시/한국시 2023. 10. 9. 18:34
탁목 - 복효근 시인(1962-) 죄 많은 짐승이었을 것이다 닥따그르 딱따그르-- 새는 나무에 머리를 짓찧으며 울어야 했을 것이다 벌레나 잡아먹으며 연명해야 하는 생 고달프기도 했겠으나 숲에는 또 그와 같이 구멍 뚫린 나무토막 제 머리를 때리듯 자꾸만 때리며 딱 딱 딱 딱 딱따그르 딱따그르------- 벌레 같은 번뇌를 죽여 삼ㄱ키며 살아가는 생도 있다 깊은 숲에 들지도 못하고 저무는 숲길 언저리에서 딱따그르 딱 딱 딱따그르르---------- 그 소리에나 부딪쳐 가슴에 허공을 내며 이렇게 벌레처럼 아픈 생도 있다 복효근 시집 실천문학사, 2013년, 중에서 탁목: 딱따구릿과에 속한 새를 통틀어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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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 복효근 시인(1962-)현대시/한국시 2023. 10. 7. 23:47
늦가을 - 복효근 시인(1962-) 술 덜 깬 아침 한나절 약속 어긴 것 화 안 내고 혼자서 지리산 둘레길 산행 나가는 낡은 아내 미웁지 않다 혼자 돌아가는 음악 무슨 뜻인지 몰라 소프라노 낯선 나라 말 그냥 악기 소리처럼 싫지 않다 너무 많은 나에게 내가 지쳐서 전화 한 통 없는 이 쓸쓸함이 좀 오래갔으면 좋겠다 마당귀엔 산에서 옮겨 심은 용담 꽃잎 벌리는 의뭉스런 햇살 손길 내 몸이 간지럽다 벌 한 마리 꽃우물에 빠져 맴돌고 가만가만 진저리 쳐대는 꽃 저들의 한바탕 음화 같은 풍경에 때 아닌 내 거시기가 선다 무리에서 처져서 산다는 부끄럼 말고도 처진 자만이 아는 권태로운 즐거움도 있어 아주 먼, 여자를 떠올리며 수음을 했다 이 좀스러운 외도가 그리 죄스럽지 않은 마흔아홉 늦은 가을 복효근 시집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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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어의 못을 뽑고 - 복효근 시인(1962-)현대시/한국시 2023. 10. 7. 11:08
타이어의 못을 뽑고 - 복효근 시인(1962-) 사랑했노라고 그땐 또 어쩔 수 없었노라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를 너를 찾아 고백하고도 싶었다 -- 그것은 너나 나의 가슴에서 못을 뽑아버리고자 하는 일 그러나 타이어에 박힌 못을 함부로 잡아 뽑아버리고서 알았다 빼는 그 순간 피식피식 바람이 새어 나가 차는 주저앉고 만다 사는 일이 더러 그렇다 가슴팍에 대못 몇 개 박아둔 채 정비소로 가든지 폐차장으로 가든지 갈 데까지는 가는 것 갈 때까지는 가야 하는 것 치유를 꿈꾸지 않는 것 꿈꾼대도 결국 치유되지 않을 것이므로 대못이 살이 되도록 대못을 끌어안는 것 때론 대못이 대못 같은 것이 생이 새어 나가지 않게 그러쥐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복효근 시집 (주)실천문학, 2013,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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탯줄 - 문정희 시인(1947-)현대시/한국시 2023. 10. 5. 12:20
탯줄 - 문정희 시인(1947-) 대학병원 분만실 의자는 Y자였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새끼 밴 짐승으로 두 다리 벌리고 하늘 향해 누웠다 성스러운 순간이라 말하지 마라 하늘이 뒤집히는 날카로운 공포 이빨 사이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불인두로 생살 찢기었다 드디어 내 속에서 내가 분리되었다 생명과 생명이 되었다 두 생명 사이에는 지상의 가위로는 자를 수 없는 긴 탯줄이 이어져 있었다 가장 처음이자 가장 오래인 땅 위의 끈 이보다 확실하고 질긴 이름을 사람의 일로는 더 만들지 못하리라 얼마 후 환속한 성자처럼 피 냄새 나는 분만실을 한 어미와 새끼가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왔다 문정희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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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 문정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0. 5. 08:21
할머니 - 문정희 시인 누구나 할머니를 좋아하지만 할머니가 되는 것은 싫어한다네 눈물로 만든 달이 딸이 되고 어미가 되고 가을엔 땅을 다독이는 낙엽 같은 손을 가진 할머니가 되지만 태고의 바람처럼 그윽한 할머니의 기도를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하지만 참 이상도 하지 아픈 배를 문지르던 따스한 약손 부드러운 영토 할머니가 되는 것은 슬퍼한다네 갑자기 다가든 추운 날씨에 할 수 없이 끌어당겨 덮고 가야 할 포근한 담요처럼 평화로운 옛이야기 같은 할머니가 시시각각 곁으로 다가드는 것을 두려워한다네 문정희 시집 중에서 읽은 소감 안티에이징anti-aging을 선호하는 요즘 세상에서 늙는다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은 일이나, 어디 그게 가능한가? 나부터 늙어감을 사랑할 일이다. 늙음을 참 인상적으로 표현했고, 두고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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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내 - 문정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0. 5. 08:11
나의 아내 - 문정희 시인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또 시를 쓸 때나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때면 살며시 차 한 잔을 끓여다 주는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내 성씨의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 오래전 밀림 속에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이제 멸종되어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 같은 오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