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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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눈 덮인 새벽 - 도종환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9. 4. 12:43
눈 덮인 새벽 - 도종환 시인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덮어놓고 새벽은 산허리로 물러나 앉은 채 사람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헐벗은 나뭇가지도 텅 빈 들판도 감히 손대기 어려운 고운 풍경으로 바꾸어놓고 고요히 호흡을 가다듬는 초겨울 새벽에는 나도 조건 없이 남을 덮어주고 싶습니다 용서하고 싶습니다 내 마음 눈 덮인 들판처럼 넓고 깨끗해져 그러는 건 아니고 지난날 용서받고 싶은 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틀거리며 걸어온 발자국을 함박눈이 밤새 덮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끄럽게 돌아선 골목길 있어야 할 어려운 자리를 지키지 않고 내내 마음 무겁던 나날들과 지키지 못한 언약들도 눈처럼 다 덮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도종환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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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공자(孔子)의 생활난(生活難) - 김수영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9. 2. 23:00
공자(孔子)의 생활난(生活難) - 김수영 시인 꽃이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 나는 발산(發散)한 형상(形象)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作戰)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 이태리어(語)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事物)과 사물의 생리(生理)와 사물의 수량(數量)과 한도(限度)와 사물의 우매(愚昧)와 사물의 명석성(明晳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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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홍범도 장군의 절규 - 이동순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9. 1. 23:28
뉴스를 보다가 이 시를 접하고 이곳에 옯겨보았다. 진짜 이런 bullshit같은 일은 없어야 하는데...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는 묵인해놓고, 말로는 부인도 찬성도 안 했다고, 말장난하는 영혼이 없는 싼티나는 인간들, 홍 장군의 가벼운 흠을 잡아 욕보이는 인간들, 그리고 제 역할 확실히 한 군인을, 최고 존엄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어거지로 죄명을 목에 달아 입막음 하고 처벌하려는 머저리 저능아 인간들을, 귀신들아, 제발 이런 인간들 좀 잡아가다오. 홍범도 장군의 절규 - 이동순 시인 그토록 오매불망 나 돌아가리라 했건만 막상 와본 한국은 내가 그리던 조국이 아니었네 그래도 마음 붙이고 내 고향 땅이라 여겼건만 날마다 나를 비웃고 욕하는 곳 이곳은 아닐세 전혀 아닐세 왜 나를 친일매국노 밑에 묻었는가 그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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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아무도 없는 별 - 도종환 시인(1954-)현대시/한국시 2023. 9. 1. 10:17
벌써 선선해진 9월의 첫날이다. 완연한 가을의 쓸쓸한 분위기를 얼마전부터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별 – 도종환 시인(1954-) 아무도 없는 별에선 그대도 나도 살 수 없다 달맞이꽃이 피지 않는 별에선 해바라기도 함께 피어나지 않고 폭풍우와 해일이 없는 곳에선 등 푸른 물고기도 그대의 애인도 살 수 없다 때로는 화산이 터져 불줄기가 온 땅을 휩쓸고 지나고 그대를 미워하는 마음 산을 덮어도 미움과 사랑과 용서의 긴 밤이 없는 곳에선 반딧불이 한 마리도 살 수 없다 때로는 빗줄기가 마을을 다 덮고도 남았는데 어느 날은 물 한 방울 만날 수 없어 목마름으로 쓰러져도 그 물로 인해 우리가 사는 것이다 강물이 흐르지 않는 별에선 그대도 나도 살 수 없다 낙엽이 지고 산불에 산맥의 허리가 다 타들어가도 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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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강변 마을 - 노향림 시인 (1942-)현대시/한국시 2023. 8. 28. 19:51
강변 마을 - 노향림 시인 찻집 '째즈'에 올라간다. 카펫 붉게 깔린 삼층 계단 옆에서 제 몸집보다 큰 트럼펫을 들고 흑인 가수 루이 암스트롱의 커단 눈망울이 잠시 나를 노려본다. 브랜드 커피엔 하얀 각설탕을! 카푸치노? 아니, 아니 나는 블랙만 마실 거야 블랙혹이라는 말보다는 더 검은 커피를? 그럼 긓지, 검은 커피 한잔이 내 앞에 당도한다. 나는 강변 마을에 와서도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창가가 참 좋다. 오늘따라 바람이 센지 짱짱한 구름떼만 하늘에서 펄럭인다. 브래지어가 흘러내리고 흰 속 치마가 절반쯤 뜯기고 찢겨나간 구름을 보는 것이 참 좋다. 아직 봄은 일러서 오지 않고 꽃샘바람에 눈꺼풀 닫은 채 종일 공중을 향해 팔을 벌리고 벌서듯 서 있는 나무들 매캐한 매연 속에 푸른 잎을 틔울까 말까 생각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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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다소 의심쩍은 결론 - 천양희 시인(1942-)현대시/한국시 2023. 8. 28. 19:42
다소 의심쩍은 결론 – 천양희 시인 으악새는 새가 아니라 풀이고요 용서대는 누각이 아니라 물고기라네요 날 궂은 날 때까치는 울지 않고요 잠자리는 죽어서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네요 길이 없는 숲속에 근심이 없고요 파도 소리 있는 곳에 황홀이 있다네요 물은 절대 같은 물결 그리지 않고요 돌에도 여러 무늬가 있다네요 시작해야 시작되고요 미쳐야 미친다네요 사람에게 우연인 것이 신에게는 의도적 섭리라네요 이로운 자리보다 의로운 자리가 꽃자리라네요 그러니까 모든 완성은 속박이라네요 천양희 시집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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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하늘이 제 빛으로 - 박일규 시인(1933-)현대시/한국시 2023. 8. 26. 22:34
하늘이 제 빛으로 - 박일규 시인 하늘이 제 빛으로 보이는 날은 새삼 기도문을 외우지 말자 고운 하늘빛 내려 앉도록 맑게 마음의 뜨락을 쓸자 배도 돛도 안 보이는 머언 하늘가 하늘과 바다가 하나로 뵈는 날은 묵상과 염도도 고이 멈추자 나도 내 마음도 아득히 멀고 하늘만 맑게 보이는 날은 아무 기도문도 외우지 말자 사랑이, 거룩함이 누리에 자욱하면 어떤 기도문도 외우지 말고 처음인듯 우러러 하늘을 보자 *시인 소개* 박일규 시인은 1933년 전라북도 정읍 학동에서 태어나 전주농업학교, 전북대 상대를 거쳐 사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6·25 사변 때 사업에 투신하여 한국중앙기계 대표, 내쇼날 합성대표, 한국후지기계주식회사 회장 등을 지냈다. 한편 청년기부터 다듬어온 시력詩力으로 중년에 미당 서정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