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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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버스 정거장에서 - 오규원 시인(1941-2007)현대시/한국시 2023. 9. 21. 15:07
버스 정거장에서 - 오규원 시인(1941-2007)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내미는 내 주민등록증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주민등록증 번호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한 된다면 안 되는 모두를 시라고 하면 안 된나 나는 어리석은 독자를 배반하는 방법을 오늘도 궁리하고 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며 오지 않는 버스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시를 모르는 사람들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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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오늘 쓰는 편지 – 나의 멘토에게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9. 20. 21:57
오늘 쓰는 편지 – 나의 멘토에게 – 천양희 시인 순간을 기억하지 않고 하루를 기억하겠습니다 꽃을 보고 울음을 참겠습니다 우울이 우물처럼 깊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가장 슬픈 날 웃을 수 있는 용기를 배우겠습니다 혼자 사는 자유는 비장한 자유라고 떠들지 않겠습니다 살기 힘들다고 혼자 발버둥 치지 않겠습니다 무인도에 가서 살겠다고 거들먹거리지 않겠습니다 술 마시고 우는 버릇 고치겠습니다 무지막지하게 울지는 않겠습니다 낡았다고 대놓고 말하는 젊은것들 당장 따끔하게 침 놓겠습니다 그러면서 나이 먹는 것 속상해하지 않겠습니다 나를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겠습니다 결벽과 완벽을 꾀하지 않겠습니다 병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하루를 생의 전부인 듯 살겠습니다 더 실패하겠습니다 천양희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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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샛강 – 노향림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9. 20. 21:54
샛강 – 노향림 시인 봄이 풀어진 눈매로 강 둔치에 포복해오고 헝클린 머리 강이 파랗다. 실버들이 기지개를 켠다 제 몸 속의 물소리 바아내느라 파랗다. 봄이 제 갈 길 멀다고 절두산 성지 아래 희끗희끗한 잔해로 남았다 안색이 창백한 갈대의 머리채를 잡고 막무가내로 흔든다 무슨 일일까. 누군가 시름시름 앓다가 내버린 마음속의 그루터기들이 집착처럼 남았다. 몸의 가는 신경올을 건드렸을까. 물은 사방 낮게 흐른다. 할로겐 불빛 희미한 비공개 지하 성인묘지 앞 계단에서 대낮부터 한 노파가 무릎 꿇어 일어날 줄 모른다 몇끼의 금식으로 십자성호를 그을까. 우수(雨水) 지나 움츠렸던 청청하늘이 성급히 창문 여닫는 소리. 당산 지나 옛 나루터 자리 간 곳 없고 양화대교만 차들이 어지러이 달려서 소란스럽다. 뒤돌아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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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나는 기쁘다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9. 16. 23:32
나는 기쁘다 – 천양희 시인 바람결에 잎새들이 물결 일으킬 때 바닥이 안 보이는 곳에서 신비의 깊이를 느꼈을 때 혼자 식물처럼 잃어버린 것과 함께 있을 때 사는 것에 길들여지지 않을 때 욕심을 적게 해서 마음을 기를 때 슬픔을 침묵으로 표현할 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으므로 자유로울 때 어려운 문제의 답이 눈에 들어올 때 무언가 잊음으로써 단념이 완성될 때 벽보다 문이 좋아질 때 평범한 일상 속에 진실이 있을 때 하늘이 멀리 있다고 잊지 않을 때 책을 펼쳐서 얼굴을 덮고 누울 때 나는 기쁘고 막차 기다리듯 시 한 편 기다릴 때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쓰는 일일 때 나는 기쁘다 천양희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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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나리소 -도종환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9. 4. 16:41
나리소 – 도종환 시인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가장 고요해지는 사랑이 깊은 사랑이다 나릿재 밑에 나리소 못이 가장 깊고 고요하듯 요란하고 진부한 수식이 많은 사랑은 얕은 여울을 건너고 있는 사랑이다 사랑도 흐르다 깊은 곳을 만나야 한다 여울을 건너올 때 강물을 현란하게 장식하던 햇살도 나리소 앞에서는 그 반짝거림을 거두고 조용해지듯 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마음이 가장 깊고 착해지지 않으면 진짜 사랑이 아니다 물빛처럼 맑고 투명하고 선해지지 않으면 도종환 시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