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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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하얀 운동화 - 박경리 소설가(1926-2008)현대시/한국시 2023. 9. 28. 19:20
이 시집을 읽게 된 계기는 이렇다. 내가 이 시집을 읽게 된 건 도서관에 시집을 빌리러 갔다가 낯익은 이름이 있어 골라 들었는데, 그게 바로 여러 해 전 타계한 한국 문단의 거목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시집이었다. 그래서 앞뒤 안 가리고 집어들었다. 소설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분이 시를 썼다니 믿겨지지 않았다. 하얀 운동화 - 박경리 소설가(1926-2008) 어릴 적에 하얀 운동화 신었다고 따돌리어 외톨이 된 일 있었다 비 오시던 날 신발을 잃고 학교 복도에 서서 울었다 하얀 운동화는 물받이 밑에서 물을 가득 싣고 놓여 있었다 나는 짚신 신고 산골서 다니는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지금도 나는 가끔 산골 아낙이 못된 것을 한탄한다 박경리 시집 중에서 저자 소개 박경리는 1926년 유치환(1908-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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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가을이 왔다 - 오규원 시인 (1941-2007)현대시/한국시 2023. 9. 22. 18:48
가을이 왔다 - 오규원 시인 (1941-2007) 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고 담장을 넘어 현관 앞까지 가을이 왔다 대문 옆의 황매화를 지나 비비추를 지나 돌단풍을 지나 거실 앞 타일 바닥 위까지 가을이 왔다 우리 집 강아지의 오른쪽 귀와 왼쪽 귀 사이로 왔다 창 앞까지 왔다 매미 소리와 매미 소리 사이로 돌과 돌 사이로 왔다 우편함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왔다 친구의 엽서 속에 들어 있다가 내 손바닥 위에까지 가을이 왔다 오규원 시집 중에서 지인께서 우리 텃밭에 갔다주셔서 심었는데 그동안 이름을 모르고 있다가, 구글 검색으로 그 정체를 오늘 드디어 밝혀내어 여기에 이 놈인지 이 년인지 풍선초를 포스팅한다. 호박도 아니고, 박도 아니고, 여주도 아니고, 그 이름이 뭘지 무척 궁금했는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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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버스 정거장에서 - 오규원 시인(1941-2007)현대시/한국시 2023. 9. 21. 15:07
버스 정거장에서 - 오규원 시인(1941-2007)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내미는 내 주민등록증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주민등록증 번호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한 된다면 안 되는 모두를 시라고 하면 안 된나 나는 어리석은 독자를 배반하는 방법을 오늘도 궁리하고 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며 오지 않는 버스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시를 모르는 사람들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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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오늘 쓰는 편지 – 나의 멘토에게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9. 20. 21:57
오늘 쓰는 편지 – 나의 멘토에게 – 천양희 시인 순간을 기억하지 않고 하루를 기억하겠습니다 꽃을 보고 울음을 참겠습니다 우울이 우물처럼 깊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가장 슬픈 날 웃을 수 있는 용기를 배우겠습니다 혼자 사는 자유는 비장한 자유라고 떠들지 않겠습니다 살기 힘들다고 혼자 발버둥 치지 않겠습니다 무인도에 가서 살겠다고 거들먹거리지 않겠습니다 술 마시고 우는 버릇 고치겠습니다 무지막지하게 울지는 않겠습니다 낡았다고 대놓고 말하는 젊은것들 당장 따끔하게 침 놓겠습니다 그러면서 나이 먹는 것 속상해하지 않겠습니다 나를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겠습니다 결벽과 완벽을 꾀하지 않겠습니다 병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하루를 생의 전부인 듯 살겠습니다 더 실패하겠습니다 천양희 시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