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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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우편번호 - 김종해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22. 13:58
아래의 시는 시집을 읽을 때 눈길을 사로잡았던 시이다. 앞에서 아버지를 다룬 詩가 있었으니 이번에는 어머니를 다룬 詩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소개한다. 그녀의 우편번호 – 김종해 시인 오늘 아침 내가 띄운 봉함엽서에는 손으로 박아쓴 당신의 주소 당신의 하늘 끝자기에 우편번호가 적혀 있다 길 없어도 그리움 찾아가는 내 사람의 우편번호 소인이 마르지 않은 하늘 끝자락을 물고 새가 날고 있다 새야, 지워진 길 위에 길을 내며 가는 새야 간밤에 혀 끝에 굴리던 간절한 말 그립다, 보고 싶다, 뒤척이던 한마디 말 오늘 아침 내가 띄운 겉봉의 주소 바람 불고 눈 날리는 그 하늘가에 당신의 우편번호가 적혀 있다 * 나는 오늘도 편지를 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 수신인의 이름을 또렷이 쓰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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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22. 13:55
아래의 시는 유안진 시인의 아버지의 마음을 찾다가 발견한 詩인데, 의미가 있어, 소개해본다.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시인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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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수제비 - 남재만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20. 23:32
오늘 아침 의 "느낌 한 스푼"에서 소개된 詩이다. 물수제비 - 남재만 시인 아내의 회갑 날 아이들과 함께 모처럼 바닷가를 찾았다 물이 하도 맑고 잔잔해 난 조약돌을 주워 오랫만에 물수제빌 떠 봤다 그러나 기껏 두세 번 담방거리고는 이내 갈앉아버리는 조약돌 내 어줍잖은 솜씰 보다 말고 아내는 웃으며 이제 그만 하고 가자고 했지만 난 막무가내 던지고 또 던졌다 물수제비 아홉 개가 용케도 물찬 제비처럼 바다 위를 미끌어질 때까지 아내는 알까 몰라 많이도 말고 아흔 살까지만 건강히 살라는 내 아홉 개 물수제비의 속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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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머리에 서서 - 박목월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20. 12:10
밭머리에 서서 - 박목월 시인 저 빛나는 저 충만한 생명의 주인은 따로 계신다 저 충만한 생명의 주인은 따로 계신다 우리 이마 위에 해를 뜨게 하고 후끈한 사랑으로 가슴을 덥게 하고 촉촉히 비를 뿌리시는 아아 그분의 어지신 경영 너그러운 베푸심 너무나 벅찬 생명의 광휘에 나는 다만 넋을 잃을 뿐 저 황홀한 푸름 저 넘치는 자라남 나는 밭머리에 서서 밭 임자가 누굴까 생각한다. 명목상 밭 임자야 내가 틀림없지만 저 줄기찬 성장 저 황홀한 생명의 광휘 싱싱하게 빛나는 밭머리에 서서 나는, 밭 임자가 누굴까 명목상 밭 임자야 내가 틀림없지만 명목상 밭 임자야 내가 틀림없지만 무슨 힘으로 내가 생명을 눈 뜨게 하고, 땅 속에 뿌리를 펴게 하고, 저 잎사귀 하나마다 황홀한 광채를 베풀 것인가 나는 다만 어리석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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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옷자락 - 신달자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19. 12:08
신달자 시인이 천주교 신자인 줄은 모르고 있었는데, 북촌이란 시집을 읽으면서 알게 되어, 신앙을 표현한 시인의 시 한 편을 아래에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도 없이 무례하게 소개한다. 영리 목적이 아닌만큼 양해하시리라 믿는다. 성모님의 옷자락 - 신달자 시인 이른 새벽 목력 꽃잎 하나 같은 문 열고 어둠 한 가닥 당깁니다 잡고 보니 성모님의 옷자락입니다 검은 어둠을 당긴 것인데 푸르스름한 청색 옷깃입니다 만집니다 마십니다 끌어안습니다 순간 오늘 다시 태어난 미움과 증오가 술술 풀려 흐릅니다 오늘 새벽에 태어난 미움과 증오는 아기 울음소리를 냅니다 내 마음의 몸의 매듭들이 따라웁니다 오후가 되면 미움과 증오도 나이가 듭니다 나이가 들기 전에 울음을 그치게 합니다 연한 새싹 같은 매듭들이 숨 쉴 때마다 말할 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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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신발 - 신달자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16. 11:54
헛신발 - 신달자 시인 여자 혼자 사는 한옥 섬돌 위에 남자 신발 하나 투박하게 놓여 있다 혼자 사는 게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남자 운동화에서 구두에서 좀 무섭게 보이려고 오늘은 큰 군용 신발 하나 동네에서 얻어 섬돌 중간에 놓아두었다 몸은 없고 구두만 있는 그는 누구인가 형체 없는 괴괴(怪鬼) 다른 사람들은 의심도 없고 공포도 없는데 아침 문 열다가 내가 더 놀라 누구지? 더 오싹 외로움이 밀려오는 헛신발 하나 민음의 시 227, 신달자 시집, 민음사, 2016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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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修養)대군 – 천양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3. 11. 16. 11:48
수양(修養)대군 – 천양희 시인 수양대군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다 그는 웃음을 몰고 다닌다 바람을 일으키며 한바탕 몰려오는 그는 유독 분노를 분뇨라 하고 인품을 인분이라 발음한다 공분할 일이 생기면 분뇨의 폭발이 일어날 것 같다고 하고 인품 없는 사람을 보면 인분 냄새가 등천할 것 같다고 한다 말과 깊이 내통한 그를 보고 내심 반가웠다 그의 말이 웃음처럼 번지면 감동 없는 날을 베고 싶은 적도 있다 그는 뭉텅뭉텅 말이나 던져주면서 막힌 구멍을 숭숭 뚫어주지만 누가 똥을 싸줄 수 없듯이 누가 대신 화를 풀어주긴 어렵다고 능청을 떤다 인분이 퇴비의 재료가 되듯이 건강한 분노는 인품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아무 데서나 분노를 표시하는 건 공공장소에서 분뇨를 투척하는 일이라고 마음속에 분노가 쌓이면 그 인생은 한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