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의 기억 木鐸論 / 이명수 (1945-) <울기 좋은 곳을 안다> 중에서 스님이 오랜만에 절집에 돌아오셨다 법당에 들어가 목탁을 치셨다 목탁이 제 소리를 내지 않았다 목탁도 자주 쳐 주지 않으면 제 소리를 잃고 만다 제가 목탁인 것을 잊은 것이다 꽹과리, 징도 자주 쳐 주지 않으면 쇳소리를 잃고 만..
목마와 숙녀 / 박인환 (1926-1956)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1903-1950)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
기적 / 정호승 (1950- )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중에서 수녀들이 날마다 강간을 당한다 술취한 아버지를 아들이 칼로 찌르고 방에 불을 지르고 어머니가 발가벗고 아들에게 체위를 가르친다 아침마다 지하철은 개미들을 가득 싣고 한강으로 빠지고 개들이 고무신을 신고 낙엽을 밟으며 청와대 앞..
기다림 / 모윤숙 (1910-1990) 천 년을 한 줄 구슬에 꿰어 오시는 길을 한 줄 구슬에 이어 드리겠습니다. 하루가 천 년에 닿도록 길고 긴 사무침에 목이 메오면 오시는 길엔 장미가 피어지지 않으오리다. 오시는 길엔 달빛도 그늘지지 않으오리. 먼 먼 나라의 사람처럼 당신은 이 마음의 방언(方言)을 왜 그..
긍정적인 밥 / 함민복 (1962-) 시 한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에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
그 꽃의 기도 / 강은교 (1945-) 오늘 아침 마악 피어났어요 내가 일어선 땅은 아주 조그만 땅 당신이 버리시고 버리신 땅 나에게 지평선을 주세요 나에게 산들바람을 주세요 나에게 눈 감은 별을 주세요 그믐 속 같은 지평선을 그믐 속 같은 산들바람을 그믐 속 같은 별을 내가 피어 있을 만큼만 내가 일..
그림자도 반쪽이다 / 유안진 (1941- ) 편두통이 생기더니 한 눈만 쌍꺼풀지고 시력도 달라져 짝눈이 되었다 이명도 가려움도 한 귀에만 생기고 음식도 한쪽 어금니로만 씹어서 입꼬리도 쳐졌다 오른쪽 팔다리가 더 길어서 왼쪽 신이 더 빨리 닳는다 모로 누워야 잠이 잘 오고 그쪽 어께와 팔이 자주 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