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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花果 / 주용일 (1964-) <꽃과 함께 식사> 중에서 안으로 숨어든 젖꼭지, 함몰 유두를 아느냐 너를 젖먹일 수 없어 몸속으로 꽃 피우다 보니 뿌리까지 둥근 유선이 열렸다 가지에 잎에 도는 흰 젖, 내가 나를 젖먹이는 일만큼 슬픈 일이 지상 어디에 있겠느냐 바깥으로 젖꼭지 밀어내지 못하여 내 젖..
무인도 / 이생진 (1929- ) <그리운 바다 성산포>에서 무인도라고 찌푸리는 것은 섬이 아니라 물살이다 외로워 살 맛이 없다고 엄살을 부리는 것은 등대가 아니라 소나무 소리다 백년을 살아도 살 맛이 없다고 신경질 부리는 것은 바위가 아니라 풍란이다
루즈가 묻은 담배꽁초는 섹시하다 / 정호승 (1950-)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중에서 새벽 미사가 끝나자 눈이 내린다 어깨를 구부리고 눈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롱부츠를 신은 여자가 가로등 불빛 아래 담배를 피우며 서 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이라도 한..
러브호텔 / 문정희 (1947-)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
맑은 날의 얼굴 / 마종기 (1939-) 그만한 고통도 경험해보지 않고 어떻게 하늘나라를 기웃거릴 수 있겠냐구? 그만한 절망도 경험해보지 않고, 누구에게 영원히 살게 해달라 청할 수 있겠냐구? 벼랑 끝에 서 있는 무섭고 외로운 시간 없이 어떻게 사랑의 진정을 알아낼 수 있겠냐구? 말이나 글로는 갈 수 ..
만년필 / 이생진 (1929- ) <그리운 바다 성산포>에서 성산포에서는 관광으로 온 젊은 사원 하나가 만년필에 바닷물을 담고 있다
남편 / 문정희 (1947-)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 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나의 아내 / 문정희 (1947-)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 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또 시를 쓸 때나 소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