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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하고 싶다/박숙이 자연에 엎드려 절을 하고 싶다 공손히 공손히 절 올리고 싶다 잘못한 일 너무 많아 절 올리고 싶다 마른 골짜기 휘돌아 나오는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한 잔의 차 앞에서도 고개 숙이고 싶다 오월의 신록 앞에 고개 수그리고 싶다 내 발자국 불러모아 함께 엎드리자고..
. 진달래/박숙이 따 먹고 싶거든 따 먹어라 꺾고 싶거든 꺾어라 다만 한 점의 죄의식 없이 날 취하라! 시집<활짝>(2011.시안)
화곡역 청소부의 한달 월급에 대하여 / 최종천(1954-) 올해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겠다는 지원비가 드디어 한 달에 100만원씩 1200만원으로 올랐다, 용렬하게 이 몸도 신청했다. 문득 화곡역 청소부에게 한달 월급이 얼마나 되느냐고 왜 물어보고 싶었을까? 63만원이라고 했다. 시집도 내고 ..
순서 / 안도현(1961-) 맨 처음 마당 가에 매화가 혼자서 꽃을 피우더니 마을회관 앞에서 산수유나무가 노란 기침을 해댄다 그 다음에는 밭둑의 조팝나무가 튀밥처럼 하얀 꽃을 피우고 그 다음에는 뒷집 우물가 앵두나무가 도란도란 이야기하듯 피어나고 그 다음에는 재 너머 사과밭 사과나..
산산조각 / 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
새해의 맑은 햇살 하나가 / 정호승 해뜨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새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갑니다 누님같은 소나무가 빙그레 웃는 새해의 아침이 밝아옵니다 맑은 연꽃대에 앉은 햇살 하나가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당신의 창을 두드리고 아무도 닦아주지 않는 당신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사..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 / 정호승 잘자라 우리 엄마 할미꽃처럼 당신이 잠재우던 아들품에 안겨 장독위에 내리던 함박눈처럼 잘자라 우리 엄마 산그림자처럼 산그림자 속에 잠든 산새들처럼 이 아들이 엄마 뒤를 따라갈 때까지 잘자라 우리 엄마 아기처럼 엄마품에 안겨 자던 예쁜 아기의 ..
거대한 분필 / 나희덕 분필은 잘 부러진다, 또는 잘 부서진다 청록의 칠판 위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파발마처럼 달리는 분필 한 자루 그것이 죽음의 소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너무 많은 분필을 낭비했다 죽은 이들의 잿가루를 모아서 만든 거대한 분필*, 사람의 키보다 훨씬 큰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