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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 / 함민복 살며 만났던 모든 선과 색들이 떨리며 녹아 들었을 간신히 발인 상처의 테두리인 저 선이 어찌 단선이랴 저 선이 어찌 단색이랴 선 그어지는 소리에 마음도 깊이 패였을 검은 선을 덮기도 했을 거북 발 같은 검은 피부에 곡선이 울어 감자, 계란, ..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 함민복 뜨겁고 깊고 단호하게 순간순간을 사랑하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바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딴전 딴전이 있어 세상이 윤활히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초승달로 눈물을 끊어보기도 하지만 늘 딴전이어서 죽음이 뒤에서 나를 몰고 ..
시선 (視線) / 마종기 (1939-) 어떤 시선에서는 빛이 나오고 다른 시선에서는 어두움 내린다. 어떤 시선과 시선은 마주쳐 자식을 낳았고 다른 시선과 시선은 서로 만나 손잡고 보석이 되었다. 다 자란 구름이 헤어질 때 그 모양과 색깔을 바꾸듯 숨 죽인 채 달아오른 세상의 시선에 당신의 살..
굴뚝 연기 / 강우식(1941-) 눈이 온 저물녘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는 어느 집에서 옥동자 낳았다고 하늘에 알리는 것 같아 너무나 경사스럽다. 가정집에서 하늘에 알리는 일로 연기밖에 뭐가 있겠는가. 로마 바티칸 성당에서도 새 교황을 세웠을 때 하늘에 알리는 신호로 연기를 피워 올리지 ..
커튼콜 / 강성은(1973-) 한밤중 맨홀에 빠진 피에로 집에 가던 중이었는데 오늘 공연은 만석이었는데 어째서 지금 이 구덩이 속에 있는가 그는 구덩이 속에 있는 자 분장을 지운 피에로 분장을 지워도 피에로 공중의 달에게 익살맞게 인사합니다 달님이여 그대는 지금 내 유일한 관객 밤새 ..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닫는다 / 최승호(1954-) 밤바다를 밟고 서 있는 홀로그램: 야광충들이 온 몸을 흘러 다니는 한 남자와 여자 서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출처: 현대문학 2012년도 10월호 ***시인 약력 및 수상경력*** 1954년: 춘천에서 태어나 춘천교대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 재직했음. 1977년: ..
새벽 인력시장 / 안평옥 모닥불이다 선잠 깬 몇몇이 손 펴 녹이는 추위가 쿨럭쿨럭 기침한다 이글거리는 통나물 불꽃이 금방이라도 짙은 어둠 사를 것 같아도 좀처럼 깨어나지 않는 새벽 그 안에 한 무더기 시름 건진다 후드득 수심(愁心)은 벌겋게 되살아나고 어둠은 더욱 짙어 간다 누..
따뜻한 봄날 / 김형영(1944-)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등에 업혀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감아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