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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깃국 / 곽재구 생일 아침상에 소고깃국이 오른다 물커진 누군가의 살점 새로 남해 어느 갯벌을 떠나온 굴 몇 점 수평 위에 둥 떠 있고 미역가닥 새 드리워진 삶의 비린내도 둥둥 떠 있다 한술, 가슴 적시는 단죄의 오늘의 서정을 위해 조금씩 어깨를 수그리며 복통을 앓는다 저만치 물..
음악 / 오세영 잎이 지면 겨울 나무들은 이내 악기가 된다. 하늘에 걸린 음표에 맞춰 바람의 손끝에서 우는 악기, 나무만은 아니다. 계곡의 물소리를 들어보아라. 얼음장 밑으로 공명하면서 바위에 부딪쳐 흐르는 물도 음악이다. 윗가지에서는 고음이, 아랫 가지에서는 저음이 울리는 나..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1948-1991)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 고정희 (1948-1991)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
사십대 / 고정희 (1948-1991)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절정(絶頂) / 이육사(1904-1944)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오래된 가을 / 천양희 (1942-)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 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 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엽같이 버림받은 기분에 젖은 적이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서 있어 본 적이 있는가 한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증오보다..
9월의 기도 / 박화목 (1922-2005) 가을 하늘은 크낙한 수정 함지박 가을 파란 햇살이 은혜처럼 쏟아지네 저 맑은 빛줄기 속에 하마 그리운 님의 형상을 찾을 때, 그러할 때 너도밤나무 숲 스쳐오는 바람소린 양 문득 들려오는 그윽한 음성 너는 나를 찾으라! 우연한 들판은 정녕 황금물결 훠어이 훠어이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