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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가 모르는가 / 이세방 시인 사람이 인생을 지쳐가다 보면 가끔씩 후회를 하게 마련인데, 그 후회라는 걸 하지 않겠다고 다짐들을 하지만 아는가, 큰 욕심을 버린다면 후회는 다른 사람의 것이 될 걸 모르는가, 깨달음은 어디서 오나 밤이 지나야 아침이 온다는 것을 ***위 시는 서울 지..
여승(女僧) / 송수권 시인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女僧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
아내의 젖을 보다 / 이승하 나이 쉰이 되어 볼품없이 된아내의 두 젖가슴이아버지 어머니 나란히 모신 무덤 같다 유방암이란다두 아이 모유로 키웠고내가 아기인 양 빨기도 했던아내의 젖가슴을 이제메스로 도려내야 한다 나이 쉰이 다 되어 그대관계를 도려내고 기억을 도려내고그 숱..
젊은 날의 초상 / 송수권(1940-) 위로 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위로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슬픔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슬픔을 나누는 사람은 행복하다. 더 주고 싶어도 끝내 더 줄 것이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렇게 젊은 날을 헤매인 사람은 행복하다. 오랜 밤..
비오는 날 / 천양희 잠실 롯데백화점 계단을 오르면서 문득 괴테를 생각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생각한다 베르테르가 그토록 사랑한 롯데가 백화점이 되어 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친구의 승용차 소나타lll를 타면서 문득 베토벤을 생각한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3악..
더불어 꽃 / 박시교 얼만큼 황홀해야 갇혔다 하겠느냐 이미 나는 네 안에서 봄날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 피어나는 기쁜 숨결일 뿐인 것을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 이만하면 꽃이다
서울 지하철에서 놀라다 / 함민복 1 열차가 도착한 것 같아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스크린도어란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민망하여 별로 놀라지 않은 척 주위를 무마했다 스크린도어에, 옛날처럼 시 주련(株聯)이 있었다 문 맞았다 2 전철 안에서 의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모두 귀에 청진..
동막리 161번지 양철집 / 함민복 바다가 보이는 그 집에 사내가 산다 어제 사내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오늘 내리는 눈을 보았다 사내는 개를 기른다 개는 외로움을 컹컹 달래준다 사내와 개는 같은 밥을 따로 먹는다 개는 쇠줄에 묶여 있고 사내는 전화기줄에 묶여 있다 사내가 전화기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