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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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노트에서 - 장석남현대시/한국시 2020. 11. 22. 13:48
옛 노트에서 — 장석남(1965-)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시집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문학과지성사. 1995. 0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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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스며드는 것 -- 안도현 시인현대시/한국시 2020. 11. 8. 20:39
한참 전에 우연히 어디선가 보고서 폰에 저장해두었던 시인데 오늘 드디어 블로그에 올린다. 시를 배우는 입장에서, 이 시는 비유와 상상이 멋지고 본받고 싶은 시다. (20년 11월 8일) 마침내 아래 시의 출처를 오늘 비로소 알게 되었다. 창비에서 2008년, 2011년에 펴낸 창비시선 283, 안도현 시집 를 읽다가 아래의 시가 수록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24년 1월 26일) 스며드는 것 / 안도현 시인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쩔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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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 지리산 시인 이원규 (1962-)현대시/한국시 2020. 10. 12. 14:27
찔레꽃 / 지리산 시인 이원규 (1962-) 아비가 돌아왔다 제삿밥 물린 지도 오래 청춘의 떫은 찔레 순을 씹으며 시린 뼈마디마디 가시를 내밀며 산사나이 지리산에서 내려왔다 흑백 영정사진도 없이 코끝 아찔한 향을 올리며 까무러치듯 스스로 헌화하며 아직 젊은 아비가 돌아왔다 어혈의 눈동자 빨간 영실들이야 텃새들에게 나눠주며 얘야, 막내야 끝내 용서받지 못할 차마 용서할 수 없는 내가 왔다 죽어서야 마흔 번 해마다 봄이면 찔레꽃을 피웠으니 얘야, 불온한 막내야 혁명은 분노의 가시가 아니라 용서의 하얀 꽃이더라 하마 네 나이 불혹을 넘겼으니 아들아, 너는 이제 나의 형이다 이승에서 못다 한 인연 늙은 안해는 끝내 고개를 돌리고 네 걱정만 하더라 아서라 에비, 에비! 나보다 어린 아버지가 돌아왔다 시집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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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않은 편지_정호승 시인현대시/한국시 2020. 9. 23. 00:41
어제 우연히 YouTube를 살피다가 발견한 시(詩)이자 노래이다. 부치지 않은 편지 / 정호승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이 시는 정호승 시인의 시집 에 들어있는 시이며, 작고한 가수 김광석이 부른 노래이기도 하다. 2000년에 개봉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OST에 실려 널리 알려졌다. 노래 듣기는 https://www.youtube.com/watch?v=CxynE72DW7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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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게구름 - 최승호시인(1954-)현대시/한국시 2020. 7. 8. 15:08
뭉게구름 - 최승호(1954-) 나는 구름 숭배자가 아니다 내 가계엔 구름 숭배자가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구름 아래 방황하다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구름들의 변화 속에 뭉개졌으며 어머니는 먹구름을 이고 힘들게 걷는 동안 늙으셨다 흰 머리칼과 들국화 위에 내리던 서리 지난해보다 더 이마를 찌는 여름이 오고 뭉개졌다 흩어지는 업의 덩치와 무게를 알지 못한 채 나는 뭉게구름을 보며 걸어간다 보석으로 결정되지 않는 고통의 어느 변두리에서 올해도 이슬 머금은 꽃들이 피었다 진다 매미 울음이 뚝 그치면 다시 구름 높은 가을이 오리라 - 위 시는 최승호 시인의 복간본 시집 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