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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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저 거리의 암자 - 신달자 시인(1943-)현대시/한국시 2024. 6. 14. 11:20
무산 스님 시인을 검색하다가 아래의 시를 알게 되었다. 저 거리의 암자 - 신달자 시인 어둠이 깊어가는 수서역 부근에는트럭 한 대 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주인과 손님이 함께출렁출렁 야간 여행을 떠납니다.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빗댄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속풀이 국물이 바글바글 냄비에서 끓고 있습니다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젓가락으로 잡던 산낙지가 꿈틀 상 위에 떨어져온몸으로 문자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내지 못합니다.답답한 것이 산낙지 뿐입니까어쩌다 생의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 버린 여자도서울을 통채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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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손에 대한 예의 – 정호승 시인현대시/한국시 2024. 6. 14. 11:02
아래의 시는 오늘 아침 《주현미의 러브레터》의 "마음에 스며드는 느낌 한 스푼"에서 소개된 시이다. 손에 대한 예의 – 정호승 시인 가장 먼저 어머니의 손에 입을 맞출 것하늘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것일 년에 한 번쯤은 흰 눈송이를 두 손에 고이 받들 것들녘에 어리는 봄의 햇살은 손안에 살며시 쥐어 볼 것손바닥으로 풀잎의 뺨은 절대 때리지 말 것장미의 목을 꺾지 말고 때로는 장미 가시에 손가락을 찔릴 것남을 향하거나 나를 향해서도 더 이상 손바닥을 비비지 말 것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리지 말고눈물은 손등으로 훔치지 말 것손이 멀리 여행 가방을 끌고 갈 때는 깊이 감사할 것더 이상 손바닥에 못 박히지 말고 손에 피 묻히지 말고손에 쥔 칼은 항상 바다에 버릴 것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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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비가(悲歌) - 권오표 시인(1950-)현대시/한국시 2024. 6. 8. 18:59
아래의 시도 시집을 읽다가 발견한 아름다운 시이다. 비가(悲歌) - 권오표 시인(1950-) 갓 뽑은 무 밑동처럼서늘한 눈매를 지닌 사람과11월의 숲에 갔었네엊그제 찬비 그친 뒤 더욱수척해진 낮달하늘은 곡옥(曲玉)빛 그렁그렁한눈물을 쏟고 있었어그의 쓸쓸한 어깨처럼나무들도 쓸쓸했네그는 저만치 오도카니 서서신발 끝으로 동그라미를그렸다 지우고 그렸다 지우고나는 날개 끝에 서리 묻은 새에게한쪽 팔을 내어주는나뭇가지를 보고 있었네바람도 없는데그의 그림자가 물결처럼조금씩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어그의 등 뒤에서내 그림자도 속절없이 밀물져 흔들렸어홀로 남은 개옻나무 붉디붉은잎새 하나울컥, 떨어졌어 - 권오표 시집, 너물 멀지 않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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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겨울 초상 - 권오표 시인(1950-)현대시/한국시 2024. 6. 8. 18:51
아래의 시는 오늘 시집을 읽다가 발견한 시이다. 참으로 구수하고 정겹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들어간 시이다. 겨울 초상 - 권오표 시인(1950-) 이번만은 기어이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듯북창(北窓)을 할퀴는 눈보라에 산골 마을은잠들지 못하네맞장 한번 떠보겠노라고 등뼈를 곧추세운 대숲은아무래도 힘에 부치는지 연신 가쁜 숨비소리를 내네이장집 영감님은 새 달력에서이태 전에 먼저 간 할멈의 제삿날을 더듬고마을 젊은이들은 사랑방에 모여하 수상한 시절을 안주 삼아밤 깊도록 섯다 패를 돌리네눈 덮인 빈들에서 벼 포기는 단발령에 잘린 상투처럼연대를 이루어 전열을 가다듬는데나는 앞강이 쩡쩡 우는 소리를 들으며식어 가는 구들장에 엎드려통속 소설에 킬킬대거나 수음을 하는 일지난 밤 꿈에 자작나무 숲으로 사라진 은빛 여우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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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부부 - 문정희 시인(1947-)현대시/한국시 2024. 6. 3. 10:26
아래의 시는 오늘 아침 《주현미의 러브레터》의 "마음에 스며드는 느낌 한 스푼"에서 소개된 시이다. 부부(夫婦) – 문정희 시인 부부란 여름날 멀찍이 누워 잠을 청하다가도어둠속에서 앵하고 모기소리가 들리면순식간에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만 한 연고를손 끝에 들고 나머지를 어디다 바를까 주저하고 있을 때아내가 주저없이 치마를 걷고배꼽 부근을 내미는 사이이다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사용한신용카드와 전기세를 함께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더미를풍경으로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