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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역 / 정호승 (1950-)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중에서 봄날에 기차를 타고 종착역 여수역에 내리면 기차가 동백꽃 속으로 들어가버린다 가을에 기차를 타고 종착역 여수역에 내리면 기차는 오동도 바다 위를 계속 달린다 다시 봄날에 기차를 탁 여수역에 내리면 동백꽃이 기차가 디어버린다
여관집 마나님 / 이생진 (1929- ) <그리운 바다 성산포> 중에서 “어딜 가십니껴?” “바다 보러 갑니다” “방금 갔다오고 또 가십니껴?” “또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밤새 들락날락 바다를 보았다 알몸인 바다가 차가운 바깥에서 어떻게 자는가 밤새 들락날락 바다를 보았다
어떤 연인들 / 도종환 (1954-) <접시꽃당신> 중에서 동량역까지 오는 동안 굴은 길었다 남자는 하나 남은 자리에 여자를 앉히고 의자 팔걸이에 몸을 꼬느어 앉아 있었다 여자는 책갈피를 한 장 한 장 넘기고 남자는 어깨를 기울여 그것들을 읽고 있었다 스물 여섯 일곱쯤 되었을까 남자의 뽀얀 의수..
어디서 왔을까, 네 이름은 / 강인한 (1944-) 빗방울 하나가 돌멩이 위에 떨어진다. 가만히 돌 속으로 걸어가는 비의 혼, 보이지 않는 얼룩 하나, 햇볕 아래 마른 돌멩이 위에서 지워진다 어디서 왔을까, 네 이름은 내 가슴 속에 젖어 물빛 반짝이다가 얼룩처럼 지워져버린 네 이름은. 빗방울 하나가 돌멩이..
어두워진다는 것 / 나희덕 (1966-)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 채를 들여다보듯이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 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고 나무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어느 사이 速步가 되어 / 이성부 (1942-) 걷는 것이 나에게는 사랑 찾아가는 일이다 길에서 슬픔 다독여 잠들게 하는 법을 배우고 걸어가면서 내 그리움에 날개 다는 일이 익숙해졌다 숲에서는 나도 키가 커져 하늘 가까이 팔을 뻗고 산봉우리에서는 이상하게도 내가 낮아져서 자꾸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약현성당 / 정호승 (1950-)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중에서 서울역을 떠돌던 부랑자 한 사람이 중림동 약현성당 안으로 기어들어와 커튼에 라이터를 켜대었을 때 성당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불이야! 봄을 기다리던 제비꽃이 땅 속에서 소리쳤다 아무리 소리쳐도 성모님은 가만히 불길을 보고만 있었..
암병동 / 도종환 (1954-)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믿음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온세상이 암울한 어둠뿐일 때도 우리들은 온몸 던져 싸우거늘 희망이 있는 싸움은 진실로 행복하여라 참답게 산다는 것은 참답게 싸운다는 것 빼앗기지 않고 되찾겠다는 것 생명과 양심과 믿음을 이야기할 때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