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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자 / 고정희 (1948-1991) 환절기의 옷장을 정리하듯 애증의 물꼬를 하나 둘 방류하는 밤이면 이제 내게 남아있는 길 내가 가야 할 저만치 길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크고 넓은 세상에 객사인지 횡사인지 모를 한 독신자의 시신이 기나긴 사연의 흰 시트에 덮이고 내가 잠시도 잊어본 적 없는 ..
도둑놈풀 / 정호승 (1950-)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에서 도둑놈풀의 마음속에는 도둑의 마음이 없습니다 도둑놈의 마음속에는 도둑의 마음이 있습니다 도둑놈이 걸어간 달밤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에 보름달이 은근히 웃고 지나갑니다
두 사람 / 곽재구 (1954-)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꽃길을 지나갑니다 바퀴살에 걸린 꽃향기들이 길 위에 떨어져 반짝입니다 나 그들을 가만히 불러 세웠습니다 내가 아는 하늘의 길 하나 그들에게 일러주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마음 / 한용운 (1879-1944) 나는 당신의 눈썹이 검고, 귀가 갸름한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이 사과를 따서 나를 주려고, 크고 붉은 사과를 따로 쌀 때에, 당신의 마음이 그 사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둥근 배와 잔나비 같은..
담쟁이 / 도종환 (1954-)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을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내가 암늑대라면 / 양애경 (1956-) 내가 암늑대라면 밤 산벚나무 밑에서 네게 안길 거다 부드러운 옆구리를 벚꽃나무 둥치에 문지르면서 피 나지 않을 만큼 한 잎 가득 네 볼을 물어 떼면 너는 만약 네가 숫늑대라면 너는 알코올과 니코틴에 흐려지지 않은 맑은 씨앗을 내 안 깊숙이 터뜨릴 것이다 그러..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1950-)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에서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
님의 침묵 / 한용운 (1879-1944)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