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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전구 / 이명수 (1945-) 재래시장에 詩가 있다 집집마다 알전구가 달려 있는 서산 어물전 한 귀퉁이 알전구 옆 경고문 -이곳 전구를 빼간 도둑님아! 너희 집은 밝으냐 오늘도 빼가 봐- 알전구가 눈을 부라리고 있다 살아내는 일이 100촉 알전구만큼 뜨겁다
안 가르쳐 주지 / 이명수 (1945-) 어느 날 스님이 바보를 거두었다 며칠 후 스님이 바보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뭐야, 안 가르쳐 주지, 이름이 뭐냐니깐, 그래도 안 가르쳐 주지, 왜 안 가르쳐 주는 건데, 스님이 궁금해 죽어 버리게, 사람이 궁금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 며칠 만에 집에 들어갔다 마누라가 다..
아홉 가지 기도 / 도종환 (1954-) <접시꽃당신> 중에서 나는 지금 나의 아픔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아픔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나의 절망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절망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연약한 눈물을 뿌리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진정..
아침 낮 그리고 밤 / 이생진 (1929- ) <그리운 바다 성산포> 중에서 오늘 아침 하늘은 기지갤 펴고 바다는 거울을 닦는다 오늘 낮 하늘은 낮잠을 자고 바다는 손뼉을 친다 오늘 저녁 하늘은 불을 끄고 바다는 이불을 편다
아버지의 나이 / 정호승 (1950-)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중에서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끌러미 나를 쳐다보..
아버님 말씀 / 정희성 (1945-) 학생들은 돌을 던지고 무장 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대고 옥신각신 밀리다가 관악에서도 안암동에서도 신촌에서도 광주에서도 수백명 학생들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을 때 마다 피 묻은 작업복으로 밤늦게 술취해 돌아 오는 너를 보고 애비는 말 못 하고 문간에 서서 눈시울..
돌탑 / 이정란 아무리 높이 솟아 있어도 홀로 선 돌을 탑이라 하지 않는다. 셋이서 다섯이서 받쳐주며 높아질 때 탑이 된다. 산길 한 쪽에 아무렇게나 쌓아진 돌탑이 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건 저를 쓰러뜨리려고 수없이 다녀간 바람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돌과 힘 힘과 돌 틈으로 화기를 보내주..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김영랑 (1903-1950)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