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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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선택의 가능성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현대시/한국시 2022. 7. 25. 19:36
아래의 시는 7월3일 에서 소개된 시이다. 그래서 인터넷을 찾아 아래에 포스팅한다. 선택의 가능성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토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류를 사랑하는 나 자신보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오래된 줄무늬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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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낡은 선풍기 - 정희경 시인현대시/한국시 2022. 7. 24. 09:40
아래의 시는 이라는 음악 프로그램에서 듣고 찾아 본 시이다. 낡은 선풍기 – 정희경 시인 스위치를 넣으면 억수같이 내리는 비 덜덜덜 소리 풀어 눅눅함을 지운다 온종일 열나는 모터 갱년기가 거기 있다 정희경 시인의 를 읽는다. 무릇 시인들은 새것보다 낡고 오래된 것에서 시의 광맥을 캔다. 오랜 시간이 깃들어 있는 물건에는 군데군데 묻은 지문처럼 함께한 시간이 얼룩져 있다. 지난여름의 기억을 꺼내듯 한곳에 보관했다가 날이 더워지자 다시 찾는 선풍기, 이와 마주한 시인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초장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스위치를 넣’는 행위는 전자제품을 사용할 때 맨 먼저 취하는 동작이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는 한창 쏟아지는 소나기를 두고 흔히 쓰는 말이다. 두 개의 낯익은 표현이 서로 엮여 이룬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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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봄날에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를 들으며 - 황동규현대시/한국시 2022. 7. 9. 08:57
라디오에서 이 시를 접하고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프로그램 진행자는 황동규 시인이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가가 되고 싶은 꿈도 지닌 적이 있었다는 말도 했다. 아무튼 긴 제목의 흥미로운 시이다. 봄날에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를 들으며 - 황동규 문주란 소철 귤 화분 속 여기저기 내려앉아 피어 있는 민들레들, 턱이 낮은 네모난 괭이밥 분 가장자리에 아슬아슬 붙어 핀 놈도 있네. 이놈들이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지, 초봄 내 망사 창을 닫아두었는데. 모르는 게 어디 한두 가진가. 어느 날은 마음에 가까운 것 멀리하고 먼 것 가깝게 해보려고 몇 번 읽다 던진 책 열심히 읽었다, 전화 한 통 없이. 세상 모든 일 다 그렇다고 하지만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천천히 그 누구보다도 천천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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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콩나물의 물음표 - 김승희(1952-) 시인현대시/한국시 2022. 6. 25. 22:28
클래식FM에서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의 작가로 활동하는 유선경 작가가 쓴 책 에서 아래의 시가 소개되어 궁금해서 찾아보게 되었다. 콩나물의 물음표 / 김승희(1952-) 콩에 햇빛을 주지 않아야 콩에서 콩나물이 나온다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긴 기간 동안 밑빠진 어둠으로 된 집, 짚을 깐 시루 안에서 비를 맞으며 콩이 생각했을 어둠에 대하여 보자기 아래 감추어진 콩의 얼굴에 대하여 수분을 함유한 고온다습의 이마가 일그러지면서 하나씩 금빛으로 터져나오는 노오란 쇠갈고리 모양의 콩나물 새싹, 그 아름다운 금빛 첫 싹이 왜 물음표를 닮았는지에 대하여 금빛 물음표 같은 목을 갸웃 내밀고 금빛 물음표 같은 손목들을 위로위로 향하여 검은 보자기 천장을 조금 들어올려보는 그 천지개벽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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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노을 - 기형도 시인현대시/한국시 2022. 6. 6. 19:52
노을 – 기형도 시인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오후 6시의 참혹한 형량 단 한 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상징들을 몰아내고 있다. 도시는 곧 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속도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책이 되리라. 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오후 6시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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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오래된 기도 - 이문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2. 6. 6. 19:48
오래된 기도 – 이문재 시인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