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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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공부 - 김사인 시인현대시/한국시 2021. 4. 17. 22:34
아래의 시는 처음 21년 4월 17일 포스트했다. 24년 4월 4일 《주현미의 러브레터》의 '느낌 한 스픈'에서 소개되었다. 공부 - 김사인 시인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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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 신경림현대시/한국시 2021. 1. 8. 20:15
길 -- 신 경 림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 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에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을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 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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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학교 / 문정희현대시/한국시 2021. 1. 5. 22:41
나무 학교 / 문정희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 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 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 푸른 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 놓을 때 사랑한다! 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 하며 숲을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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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노트에서 - 장석남현대시/한국시 2020. 11. 22. 13:48
옛 노트에서 — 장석남(1965-)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시집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문학과지성사. 1995. 0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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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스며드는 것 -- 안도현 시인현대시/한국시 2020. 11. 8. 20:39
한참 전에 우연히 어디선가 보고서 폰에 저장해두었던 시인데 오늘 드디어 블로그에 올린다. 시를 배우는 입장에서, 이 시는 비유와 상상이 멋지고 본받고 싶은 시다. (20년 11월 8일) 마침내 아래 시의 출처를 오늘 비로소 알게 되었다. 창비에서 2008년, 2011년에 펴낸 창비시선 283, 안도현 시집 를 읽다가 아래의 시가 수록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24년 1월 26일) 스며드는 것 / 안도현 시인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쩔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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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 지리산 시인 이원규 (1962-)현대시/한국시 2020. 10. 12. 14:27
찔레꽃 / 지리산 시인 이원규 (1962-) 아비가 돌아왔다 제삿밥 물린 지도 오래 청춘의 떫은 찔레 순을 씹으며 시린 뼈마디마디 가시를 내밀며 산사나이 지리산에서 내려왔다 흑백 영정사진도 없이 코끝 아찔한 향을 올리며 까무러치듯 스스로 헌화하며 아직 젊은 아비가 돌아왔다 어혈의 눈동자 빨간 영실들이야 텃새들에게 나눠주며 얘야, 막내야 끝내 용서받지 못할 차마 용서할 수 없는 내가 왔다 죽어서야 마흔 번 해마다 봄이면 찔레꽃을 피웠으니 얘야, 불온한 막내야 혁명은 분노의 가시가 아니라 용서의 하얀 꽃이더라 하마 네 나이 불혹을 넘겼으니 아들아, 너는 이제 나의 형이다 이승에서 못다 한 인연 늙은 안해는 끝내 고개를 돌리고 네 걱정만 하더라 아서라 에비, 에비! 나보다 어린 아버지가 돌아왔다 시집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