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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나무 옆에 / 고은(1933-) 단풍나무 옆에 산딸나무 있네 산딸나무 옆에 상수리나무 있네 상수리나무 옆에 내 아내도 있네 이 시는 설악산 희운각 대피소에 비치된 시집에서 본 시인데 인상적이어서 여기에 옮겨본다.
창세기 55장 9절 / 박춘식 1 아으 그 옛날 하늘님이 시로써 세상을 만드셨다 2 시의 첫 구절은 경이로운 빛줄기였고 3 보기 좋고 듣기 즐겁게 여섯 구절까지 읊은 다음 4 일곱째에는 쉼표를 찍었다 5 흙덩이로 첫 사람을 빚을 때는 6 사람도 시를 지을 수 있도록 7 시혼(詩魂)을 감싸는 오관 안에 뜨거운 기..
죽고 싶으면 / 박춘식 돈 문제로 죽어야겠다면 괭이로 땅을 파라 그리고 쑥갓 무 상추를 심고 눈곱만한 싹이 돋는 것을 보면서 죽을 날짜와 장소를 멋진 곳으로 정해라 가시나 때문에 죽고 싶다면 산에 올라가 나무를 껴안고 네가 아는 모든 여자 이름을 칼날처럼 불러 모아라 친구 배신으로 또 우울증..
장마당에서 / 이상국 우리나라 나이 잡수신 길들은 아직 장마당에서 만난다 장작을 여 내 고무신을 바꾸고 소를 내다 팔아 며느리를 보던 사람들 난전 차일 아래 약장수가 놀고 장돌뱅이들 이악스럽게 설쳐대도 농사꾼들은 해마다 낫과 쇠스랑을 벼리고 감자꽃 같은 아낙들 무릎맞중을 하고 산 너머 ..
아무르 강가에서 / 박정대 그대 떠난 강가에서 나 노을처럼 한참을 저물었습니다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낮이 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유목민처럼 오래 서성거렸습니다 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을 넘어 반성도 없이 민가의 불빛들 또 함부로 일렁이며 돋..
아버지 걸으시는 길을 / 임길택 빗물에 파인 자국 따라 까만 물 흐르는 길을 하느님도 걸어오실까요 골목길 돌고 돌아 산과 맞닿은 곳 앉은뱅이 두 칸 방 우리 집까지 하느님도 걸어오실까요 한밤중, 라면 두 개 싸들고 막장까지 가야 하는 아버지 길에 하느님은 정말로 함께 하실까요 이 시 역시 <낭..
흔들리는 마음 / 임길택 공부는 않고 놀기만 한다고 아버지한테 매를 맞았다. 잠을 자려는데 아버지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으니 아버지가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미워서 말도 안 할려고 했는데 맘이 자꾸만 흔들렸다. 이 시 역시 <낭독의 발견>에서 들은 시다. 참으..
정선 / 문인수 산 넘는 재가 많다. 산 넘는 길들은 그러나 산 넘어 간 것이 아니라 산 넘어 산 속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샛길, 샛길 치며 또 그 끝을 끌어올리며 산에 붙는 것이다. 산에 붙은 가파른 감자밭 옥수수밭 바람 아래 거듭 시퍼렇게 번져 오르는 것이다. 숨이 몹시 가쁘니 느린 노래가 풀려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