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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다는 것은 / 안차애 날오이 한 개 송송 썰어 주전자에 담고 이슬 소주 한 병을 붓는다 강하고 센 소주 기운이 청오이 서늘한 담향에 삼투되기를 즐겁게 기다린다 가시를 발라내고 얌전한 안주가 된 광어처럼 지금 소주도 가시를 발라내고 있는 것이다 역한 냄새의 가시, 오래 성질 부리는 숙취..
性 /김수영 (1921-1968)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 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
바로 몸 / 정끝별 (1964-) 똥을 누며 이건 어제 점심에 먹은 비빔밥 이건 어제 저녁에 먹은 된장찌게 오줌을 눌 때마다 이건 새벽 갈증에 마신 생수 한 컵 이건 아침에 마신 커피 한 잔 늘 손익분기점 제로를 유지하려 개진하는 몸 반성하는 몸 몸을 부린 만큼 먹지 못하면 배가 고프고 몸에 맞지 않는 옷..
지리산 둘레길 만들기 [기고] 이원규 시인이 노숙인에게-2 2010년 02월 21일 (일) 14:18:53 이원규 . ▲ 사진/한상봉 핸드폰 문자는 상대방 배려 없어 대안학교에서 아이들한테 글 쓰는 자세를 가르치는데요. ‘글짓기’는 거짓말이다. 글은 쓰는 것이다. 사는 만큼 쓰는 것이다. 보고 알고 깨달은 만큼만 옮..
사랑 / 김후란 (1934-) 집을 짓기로 하면 너와 나 둘이 살 작은 집 한 채 짓기로 하면 별의 바다 바라볼 창 꽃나무 심어 가꿀 뜰 있으면 좋고 없어도 좋고 네 눈 속에 빛나는 사랑만 있다면 둘이 손잡고 들어앉을 가슴만 있다면. 전에 어느 전철역인가...에서 봐 둔 詩인데 옮겨본다. 詩란 이렇게 확- 가슴에 ..
대추 한 알 / 장 석 주 (1954- )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린 몇 밤. 저 안에 땡볕 한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감자 / 안차애 내 사랑은 심심하지만 알고 보면 깊은 농염이다 내 사랑에 온갖 맛이 들어 있다는 건 깊이 다가와 본 사람은 다 안다 춘궁(春窮)이거나 춘궁 같은 허기거나 허기보다 더 아득한 마음일 땐 심심하고 둥근 둥글고 부드러운 내 몸에 당신의 이빨자국을 찍어 보라 당신이 가진 온갖 맛 떫거나..
풀잎/조창환 (1945- ) 풀잎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향기가 드나드는 작은 숨구멍들이 보인다 숨구멍들은 늘 열려 있기도 하고 늘 닫혀 있기도 한 회전문이다 회전문으로 깃털처럼 부드러운 바람이 드나들어 바람이 흘리고 간 얼룩이 남아 있어 가을 잠자리 파르르 떨고 있는 풀잎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