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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연주 / 조두희 <그리움은 끝나지 않아>에서 별들이 논에 놀러와 발가벗고 물장구친다 바람이 달을 휘어 현絃을 매어 미루나무에 걸어 놓으면 개구리 뛰어들어 오월을 연주한다 소쩍새 우는 저녁 내 발도 논으로 간다 저자 소개 *경기 가평 출생 *계간 【시인정신】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
물 만드는 여자 / 문정희 (1947-)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려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
문막 들 / 고은 (1933- ) 남한강 건너 원주 강릉 가는 길 가지 말라 가을 걷이 문막 들 두고 가지 말라 빈 논마다 타작마당 짚 흩어 불놓으니 여기저기 순하디순한 고모부 같은 연기 푸르렀다 가지말라 문막 들 순이 내일 모레면 시집간다 다 빼앗긴 듯한 다 잃어버린 듯한 마음 그 아가씨네 개하고나 정들..
無花果 / 주용일 (1964-) <꽃과 함께 식사> 중에서 안으로 숨어든 젖꼭지, 함몰 유두를 아느냐 너를 젖먹일 수 없어 몸속으로 꽃 피우다 보니 뿌리까지 둥근 유선이 열렸다 가지에 잎에 도는 흰 젖, 내가 나를 젖먹이는 일만큼 슬픈 일이 지상 어디에 있겠느냐 바깥으로 젖꼭지 밀어내지 못하여 내 젖..
무인도 / 이생진 (1929- ) <그리운 바다 성산포>에서 무인도라고 찌푸리는 것은 섬이 아니라 물살이다 외로워 살 맛이 없다고 엄살을 부리는 것은 등대가 아니라 소나무 소리다 백년을 살아도 살 맛이 없다고 신경질 부리는 것은 바위가 아니라 풍란이다
루즈가 묻은 담배꽁초는 섹시하다 / 정호승 (1950-)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중에서 새벽 미사가 끝나자 눈이 내린다 어깨를 구부리고 눈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롱부츠를 신은 여자가 가로등 불빛 아래 담배를 피우며 서 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이라도 한..
러브호텔 / 문정희 (1947-)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
맑은 날의 얼굴 / 마종기 (1939-) 그만한 고통도 경험해보지 않고 어떻게 하늘나라를 기웃거릴 수 있겠냐구? 그만한 절망도 경험해보지 않고, 누구에게 영원히 살게 해달라 청할 수 있겠냐구? 벼랑 끝에 서 있는 무섭고 외로운 시간 없이 어떻게 사랑의 진정을 알아낼 수 있겠냐구? 말이나 글로는 갈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