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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로 돌아오려는 제자에게 / 나희덕 (1966-) 오랜만에 네 편지를 뜯는다, 한번도 너의 얼굴을 잊은 일은 없었지만은, 교실문을 여닫을 때마다 바람이 닫고 가는 문 뒤에 네가 서 있었다. 선생님, 저예요, 제가 왔어요. 저도 학교에 다시 다니고 싶어요, 또렷한 네 음성에 놀라 떨리는 손으로 수업을 시작..
상가에 초대받고 싶다 / 주용일 (1964-) <꽃과 함께 식사>에서 상가에 가고 싶다는 것은 내 맘 속 눈물의 수위가 아슬아슬하다는 것이다 그리운 사람이 많았다는 거고 세상살이 드센 일도 많이 겪었다는 것이다 드라이 플라워 같은 얼굴들 앞에서 슬픔이 위태롭게 만조 수위를 넘지 않고 잘 견뎌내고..
삶 / 고은 (1933-)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
목숨을 걸고 / 이광웅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둘 중 어느 쪽일까 / 박진환 (1936-) <諷詩調˚X>에서 법률이 적을수록 좋은 법치국가라는 영국의 속담 나라가 부패하면 할수록 법률이 늘어난다는 타기누스의 말 법 만들다 맨날 쌈박질만 하는 코리아는 둘 중 어느 쪽일까
바다.2 / 차윤옥 <노래하는 삶>에서 어느 골짜기 어느 강에서 여기까지 흘러왔는가 사람들에게 온갖 것 다 베풀고 때론 화를 내기도 하고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왔는가 아래로 아래로만 흐르다 보니 긴 노정의 끝이 바로 여기이던가 신비롭다 위대하다 자연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 가장 아래 있어..
내음새와 그리움 / 김정원 <다른 하늘 아래서도 넌 꽃이었느니> 에서 이제는 안 계시는데 어버이 그날 시골장에 가 볼거나 모란장에 가 볼거나 거기엔 만날 수 있을 듯 어머니 내음새 더덕이며 산초잎 두릅, 드물된장에 삭힌 콩잎 등 그득 한 보따리쯤 k와서 어머니 장바구니를 그 옆에서 보는 거다..
꽃 / 함민복 (1962-)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