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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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우리는 너무 멀리까지 왔다 - 신경림 시인(1935-)현대시/한국시 2024. 1. 11. 22:17
우리는 너무 멀리까지 왔다 - 신경림 시인 우리는 너무 멀리까지 왔다 내 것은 버려두고 남의 것을 쫓아 허둥대며 비틀대며 너무 멀리까지 왔다 색다른 향내에 취해 속삭임에 넋나가 이 길이 우리가 주인으로 사는 대신 머슴으로 종으로 사는 길임을 모르고 우리는 너무 멀리까지 왔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소경이 되었다 앞을 가로막은 천길 낭떠러지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었다 천지를 메운 죽음의 소리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바보가 되었다 남의 것을 쫓아 허둥대는 사이 우리 몸은 서서히 쇠사슬로 묶였지만 어떤 데는 굳고 어떤 데는 썩었지만 우리는 그것도 모르는 천치가 되었다 문득 서서 귀를 기울여보면 눈을 떠라 외쳐대는 아우성 그 소리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동은 터오는데 새벽 햇살은 빛나는데 그릇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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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우리가 지나온 길에 - 신경림 시인(1935-)현대시/한국시 2024. 1. 11. 21:35
우리가 지나온 길에 - 신경림 시인 불기없는 판자 강의실에서는 교수님의 말씀보다 뒷산 솔바람 소리가 더 잘 들렸다 을지로 사가를 지나는 전차 소리는 얼음이 깨지는 소리처럼 차고 서울에서도 겨울이 가장 빠른 교정에는 낙엽보다 싸락눈이 먼저 와 깔렸다 그래도 우리가 춥고 괴롭지 않았던 것은 서로 몸을 녹이는 더운 체온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강당 앞 좁은 뜰에서 도서관 가파른 층계에서 교문을 오르는 돌 박힌 골목에서 부딪히고 감싸고 맞부비는 꿈이 있어서 다툼이 있어서 응어리가 있어서 겨울은 해마다 포곤했고 새해는 잘 트인 큰길처럼 환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지나온 길에 붉고 빛나는 꽃들이 핀 것을 본다 우리들 꿈과 다툼과 응어리가 부딪히고 감싸고 맞부비는 속엣 화려하게 피워놓은 꽃들을 본다 - 신경림 시집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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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팔월의 기도 - 신경림 시인(1935-)현대시/한국시 2024. 1. 11. 20:43
팔월의 기도 - 신경림 시인 내 목소리로 내 노래를 부르게 해주십시오 내 말로 내 얘기를 하게 해주십시오 내 형제를 형제라 부르게 해주시고 내 원수를 원수라 미워하게 해주십시오 온 땅에 깔린 하늘에 바다에 강에 널린 넋들이여 오월의 넋들이여 팔월의 넋들이여 내 꿈은 작고 소박합니다 사십년 동안 갈라져 있던 형제들 동무들 모여 아흔 낮 아흔 밤을 목놓아 우는 것 이 땅을 짓이기고 뭉개는 구둣발을 갈갈이 갈라놓고 찢어놓는 총칼을 내 노래 내 얘기 폭풍되어 몰아내게 해주십시오 형제를 형제라 부른다 해서 원수를 원수라 미워한다 해서 뭇매질하고 발길질하고 더러운 발들을 동해바다 한복판에 쓸어넣게 해주십시오 - 실천문학사에서 1988년, 2005년 펴낸 실천문학의 시집 50, 신경림 시집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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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가장 넓은 길 - 양광모 시인현대시/한국시 2024. 1. 11. 20:30
양광모 시인의 시 일부가 2024학년도 수능 필적 확인 문구로 나왔다. 그 시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본래는 당시에 본 블로그에 소개하려고 했는데,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오늘 생각이 나서, 부랴부랴 작년에 쓰던 수첩을 뒤져, 시인의 이름을 알아내고, 다시 인터넷을 뒤져 시의 전문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모 매체에 실린 양광모 시인의 글 속에 위 시가 나온다. 그 링크는 아래와 같다. 아무튼 그래서 저녁 먹고 동네 도서관에 가서 도서관에 소장된 양광모 시인의 시집 전부인 6권을 빌릴 생각이었으나, 기존에 대출 중인 책이 이미 5권이 있어 나머지 1권은 못 빌리고 다음에 빌리기로 하고 돌아왔다. 우리 동네 도서관은 대출 권수가 최대로 10권이다. 링크: https://www.joongang.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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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오월은 내게 - 신경림 시인(1935-)현대시/한국시 2024. 1. 11. 14:18
오월은 내게 - 신경일 시인 오월은 내게 사랑을 알게 했고 달 뜨는 밤의 설레임을 알게 했다 뻐꾹새 소리의 기쁨을 알게 했고 돌아오는 길의 외로움에 익게 했다 다시 오월은 내게 두려움을 가르쳤다 저잣거리를 메운 군화발 소리 총칼 소리에 산도 강도 숨죽여 웅크린 것을 보았고 붉은 피로 물든 보도 위에서 신조차 한숨을 쉬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오월에 나는 증오를 배웠다 불 없는 지하실에 주검처럼 처박혀 일곱 밤 일곱 낮을 이를 가는 법을 배웠다 원수들의 이름 손바닥에 곱새기며 그 이름 위에 칼날을 꽂는 꿈을 익혔다 그리하여 오월에 나는 복수의 기쁨을 알았지만 찌른 만큼 찌르고 밟힐 만큼 밟는 기쁨을 배웠지만 오월은 내게 갈 길을 알게 했다 함께 어깨를 낄 동무들을 알게 했고 소리쳐 부를 노래를 알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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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새벽 안개 - 신경림 시인(1935-)현대시/한국시 2024. 1. 11. 14:07
새벽 안개 - 신경림 시인 사랑을 배우고 미움을 익혔다 이웃을 만나고 동무를 사귀고 그리고 더 많은 원수와 마주쳤다 헛된 만남 거짓 웃음에 길들여지고 헤어짐에 때로 새 힘이 솟기도 했으나 사랑을 가지고 불을 만드는 대신 미움을 가지고 칼을 세우는 법을 먼저 배웠다 법석대는 장거리에서 저무는 강가에서 이제 새롭게 외로움을 알고 그 외로움으로 노래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 그 노래로 칼을 세우는 법을 배우고 그 칼을 가지고 바람을 재우는 법을 배운다 새벽 안개 속에서 다시 강가에서 - 실천문학사에서 펴낸 실천문학의 시집 50, 신경림 시집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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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산에 대하여 - 신경림 시인(1935-)현대시/한국시 2024. 1. 9. 23:24
산에 대하여 - 신경림 시인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 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 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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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강물을 보며 - 신경림 시인(1935-)현대시/한국시 2024. 1. 9. 23:07
강물을 보며 - 신경림 시인 어떤 물살은 빠르고 어떤 물살은 느리다 또 어떤 물살은 크고 어떤 물살은 작다 어떤 물살은 더 차고 어떤 물살은 덜 차다 어떤 물줄기는 바닥으로만 흐르고 어떤 물줄기는 위로만 흐른다 또 어떤 물줄기는 한복판으로만 흐르는데 어떤 물줄기는 조심조심 갓만 찾아 흐른다 뒷것이 앞것을 지르기도 하고 앞것이 우정 뒤로 처지기도 한다 소리내어 다투기도 하고 어깨와 허리를 치고 때리면서 깔깔대고 웃기도 한다 서로 살과 피 속으로 파고들어가 뒤엉켜 하나가 되기도 하고 다시 갈라져 따로따로 제 길을 가기도 한다 때로 산골짝을 흘러온 맑은 냇물을 받아 스스로 큰물이 되기도 하고 사람들 사이을 헤집고 온 더러운 물을 동무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다리 밑도 기나고 쇠전 싸전도 지난다 산과 들판을 지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