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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어머니의 배추 - 정일근 시인현대시/한국시 2022. 12. 14. 09:09
어머니의 배추 - 정일근 시인 어머니에게 겨울 배추는 詩다 어린 모종에서 시작해 한 포기 배추가 완성될 때까지 손 쉬지 않는 저 끝없는 퇴고 노란 속 꽉 찬 배추를 완성하기 위해 손등이 갈라지는 노역의 시간이 있었기에 어머니의 배추는 이 겨울 빛나는 어머니의 詩가 되었다 나는 한 편의 詩를 위해 등 굽도록 헌신한 적 없어 어머니 온몸으로 쓰신 저 푸르싱싱한 詩 앞에서 진초록 물이 든다 사람의 詩는 사람이 읽지 않은 지 오래지만 자연의 詩는 자연의 친구가 읽고 간다 새벽이면 여치가 제일 먼저 달려와 읽고 사마귀가 뒤따라 와서 읽는다 그 소식을덛고 종일 기어온 민달팽이도 읽고 읽으면서 배부른 어머니의 詩 시집 속에 납작해져 죽어버린 내 詩가 아니라 살아서 배추벌레와 함께 사는 살아서 숨쉬는 詩 어머니의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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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눈사람의 봄날 - 박서영 시인현대시/한국시 2022. 12. 7. 13:04
눈사람의 봄날 - 박서영 시인 이사 다닌 집들이 눈사람처럼 녹아 사라져버렸다 환한 벚꽃이 깨진 창문을 잠시 엿보다 가버리고 이후의 긴 그늘에 대해선 모두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 국도를 지나쳐, 지나쳐온 봄날이었다 길 고양이 한 마리처럼 도시 외곽에서 달을 분양 받았지만 나의 열망은 달과 태양을 제본하는 것 한겨울에 만든 눈사람을 한여름에도 들여다보는 것 태양의 밀짚모자를 쓴 채 달의 털모자를 쓴 채 태양과 달은 서로의 표정을 사각사각 베어 먹고 있다 그러나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는 뜨겁고 차가운 두 얼굴은 그냥 놔두시길, 괜한 관심으로 눈썹과 코와 입술을 그려 넣지 마시길, 지금은 눈사람처럼 녹아내리고 있는 집에 들어가 그 해의 환했던 벚꽃과 어느 여름밤의 뜨거운 포옹과 술렁이는 꽃그늘 따위를 모두 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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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2. 12. 7. 12:33
링크: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1/18/2008011800034.html [애송시 100편-제14편] 한계령을 위한 연가 애송시 100편-제14편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 정 희 www.chosun.com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시인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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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11월의 나무 - 황지우 시인현대시/한국시 2022. 12. 7. 12:20
11월의 나무 - 황지우 시인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잇다 나는 등 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